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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Natural] The Beginning

수퍼내추럴 카스티엘 미니뱅에 참가했던 작품입니다.
기록용으로 남겨놓습니다.
 
사건 시기는 5시즌 피날레 이후, 6시즌 직전
The End” 이후입니다.

[#M_ [SuPerNatural] The Beginning | less.. |

이 기분을 뭐라 설명해야 할까.
딘은 반쯤은 설레고 반쯤은 자포자기한 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어차피 모두가 짐작하고 있던 결과가 아니었던가. 그가 아는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란 오직 한 가지 뿐이었고,
어떤 길을 에둘러 가든 결국 마지막으로 닿는 곳은 언제나 정해져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쩌면 그게 바로 빌어먹을 천사
나부랭이 – 날개를 토막내 버팔로 윙을 해 먹어도 속시원하지 않을 것들! – 이 말한 숙명이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일 아침
술기운이 가시고 나면 어떤 자괴감에 몸부림치게 될지 모르지만, 알게 뭔가. 저지르지 않고 후회하느니 저지르고 후회하는 편이 낫다.
그것이 딘이 아는 삶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더듬거리는
손으로 열쇠를 따고 모텔방에 들어섰을 때 딘이 목격한 것은 그의 몸에 남아있는 알딸딸한 알코올 기운을 공기중으로 증발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순간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했고, 환상이라면 꽤나 고약한 장난질이요 현실이라면 등을 돌리고 달아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얼마 전 바비가 전화통을 붙들고 한 시간 동안 늘어놓은, 지상에 내려온 초현실적인 존재들은 천사고 악마고 모조리
민폐덩어리들이니 푸닥거리라도 해서 하루 빨리 쫓아보내야 한다는 열화와 같은 성토를 들어준 적도 있지만 이런 불시의 습격에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바비가 크롤리가 심심하면 집에 쳐들어오다 못해 이제는 그
지저분한 서재에 거대한 와인셀러를 멋대로 들여놓고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계집애처럼 과실주를 홀짝이고 있다고 투덜거렸을 때 딘은
킬킬거리며 낡은 침대를 두들기다 스프링에 손을 찔릴 뻔했다. 한번은 크롤리가 바비를 찾아온 카스티엘을 앉혀놓고 와인 찬양론을
늘어놓다 바비의 술진열장을 섭렵한 카스티엘이 여러번의 시도와 테스트 끝에 몰트 위스키로 정착하자 실망을 금치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선배 경험자로서 악마에게 연민을 느끼기조차 했다. 그 뒤로 사냥꾼들이 어찌된 영문인지 의뢰비 대신 값비싼 위스키를
사들고 온다며 바비가 와인셀러 옆에 위스키를 담는 궤짝을 새로 들여놓았다고 말했을 때에는 숨넘어가게 웃다가 의자에서 굴러 떨어질뻔
했다.
바비의 집에서 악마와 술잔을 부딪치는 천사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자신의 모텔방에서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채 텔레비전 안으로 빨려들어갈 듯한 포스로 “프렌즈”에 집중하고 있는 천사의 모습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딘은 프렌치코트와 양복 상의를 고이 접어 소파 위에 올려두고 – 그는 카스티엘의 와이셔츠 차림을 처음 봤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 야근을 끝낸 10년 차 샐러리맨처럼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헤치고 소매는 반쯤 걷어 올린 채
500달러짜리 위스키 병을 들고 – 병나발을 부는 천사는 더더욱 달갑지 않았다. – 퀭한 눈으로 머리에 칠면조를 뒤집어 쓴 바보를
노려보고 있는 카스티엘을 바라보며 천천히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잘 만나고 왔나?”
썩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인간처럼 앉아 있어 놈이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천사 나부랭이라는 사실을 깜박했다. 딘은 어깨를 내려뜨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바비가 말해줬네.”
“망할 놈의 영감탱이. 나이를 먹더니 수다쟁이 할망구가 되었나.”
카스티엘이 TV 화면에서 눈을 들었다.
“어른을 공경해야지, 딘.”
딘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카스티엘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시트콤이나 보고 앉아있는 네 녀석이 할만한 소리로군. 재밌냐?”
“아니. 이건 쓰레기일세.”
카스티엘의 손에 들린 술병을 향해 손을 뻗던 딘은 순간 멈칫 했다.

숨도 쉬지 않고 말을 내뱉지만 아무 의미도 없는 껍데기일 뿐이야. 뜬금없이 삽입되는 웃음소리는 경악스러울 정도로 텅 비어 있고.
인간과 가브리엘은 정말로 이런 걸 재미있다고 여기는 건가? 난 웃음이란 좀 더 고귀한 것이라고 생각했네만.”
딘은 아무 말 없이 다시 어깨를 으쓱한 다음 캐스의 손에서 병을 나꿔 채 한 모금 크게 들이켰다. 방금 전까지 그가 마시던 것에
비하면 비교 자체가 모욕일 정도로 지독히 좋은 물건이었다. 천국으로 돌아가더니 부르조아가 된 모양이다. 그러고보니 구질구질한
코트도 왠지 모르게 더 고급스러워 보였다. 차라리 저 촌스러운 회계사 스타일이나 바꿔달라고 하지.
“오랜만에 동료들을 만나 즐거웠나보군.”
“도리어 맞아죽을뻔 했는데.”
“왜? 그들은 자네가 세상을 구하고 인류를 구원했다는 걸 모르는 건가?”
“그건 몰라도 내가 세상을 멸망시킬 뻔 했다는 건 알고 있더라고.”
 딘은 술병을 내려놓고 말했다. 둘 사이의 대화가 점점 더 텔레비전 속 바보들의 만담을 닮아가고 있었다. 좋지 않은 징조다.
“무슨 일이야, 캐스?”
카스티엘이 구부정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친구가 친구를 찾아오는 것도 안 되나?”
지나치게 진심으로 들려 소름이 끼쳤다.
“아무리 천사가 머리가 나쁘다지만 친구처럼 느끼기 때문에 차마 찾아올 수 없다고 바비에게 말한 건 잊었나 보지?”
순간적으로 천사 버전의 “망할 놈의 영감탱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표정이 카스티엘의 얼굴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말을 전해 듣고 딘이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면 카스티엘은 섭섭해할까? 인간을 흉내내어 일그러진 표정으로 웃음짓는 법을 배운
천사라면 그런 감정 또한 대충이나마 모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딘은 천사를 보고 싶지 않았다. 딘은 천사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천사는 천국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날개 달린 잔인한 형제자매들과 무정한 아버지를 생각나게 한다. 천사는 악마를 떠올리게 한다.
그 더럽고 야비한 것들과 공포의 제왕을 생각나게 한다.
천사는, 딘의 최후의 선택과 그의 어린 형제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생생하게 상기시켜준다. 그가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 가슴 깊이 사무치게 한다.    

날 이후 지금까지, 딘은 심지어 바비를 만나러 가지도 않았다. 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기 두려워서. 바비가 그를
바라보는 그 서글픈 눈빛을 마주하기 두려워서. 딘은 웃고 농담을 하고 술을 마시고 허풍을 떨고 행복한 척 하겠지만 바비는 속아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마지막 순간, 그의 어깨 위가 아니라 언제나 샘이 차지하고 있던 그의 옆 자리에 앉아있던 천사는
어떠할 것인가. 그들 셋은 모두 어두운 공모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천사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동조해준 천사를 증오했다.
“장비는 잘 보충했나?”
그러니까 그런 정보를 도대체 어디서 얻는 거냐고.
딘은 대답하지 않았다.
카스티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다시 사냥을 시작하는군.”
“가만히 앉아있으려니 온 몸이 근질거려서. 게다가 시작한 일은 내 손으로 마무리지어야한다는 철칙을 갖고 있어서 말이야.”
자기합리화에는 이제까지 해 온 깜냥이 있다. 그 점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할아버지도 딘을 능가하지 못할 것이다.
“여러 모로 자네에게서는 보기 드문 옳은 판단이지만, 솔직히 심적으로는 자네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길 바랐네.”
딘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말을 꿀꺽 집어 삼켰다. 지나치게 고급인 술 취향과 지나치게 형편없는 텔레비전 취향은 약과였다.
천국은 한때 그들의 적이었던 그를 재교화하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카스티엘에게 다시 은총을 돌려준 것일까.
애나처럼 인류를 사랑하는 것도 아닌, 인간을 동정하는 천사를.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네, 딘.”
악마는 그것을 거래라 부르고, 인간은 그것을 협박이라 부른다.
“형제들이 돌아오지 않고 있네.”
카스티엘은 입을 다물었다. 딘은 그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갑자기 천년 묵은 피로가 급습하기라도 한 양, 천사의 보이지 않는 날개죽지가 힘없이 아래로 늘어졌다.
“천국은….”
불쑥 말을 내뱉은 카스티엘이 목청을 가다듬었다.

많은 형제들이 잘못을 깨닫고 처벌을 두려워한 나머지 돌아오지 않고 있네. 자신들이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 그 자체를 용납하지
못하는 거야. 애나처럼 인간들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지상에 눌러 앉은 경우도 있지만, 그건 그나마 가장 사소한 축에 속하네. 문제는
천사로서의 힘과 자각을 갖고 있는 타락천사들이야. 본래 천사란 지상을 걷는 존재가 아닐세. 결국은 더럽혀지거나, 미쳐버릴
뿐이지.”
“그래서?”
갑자기 입 안이 깔깔하게 느껴졌다.
카스티엘은 고개를 들고, 딘의 눈동자 깊숙한 곳을 마주보았다.
“나는 형제들을 구하고 싶네.”
딘은 기가 막히다는 듯 피식 웃었다. 고약한 농담을 들은 양.
“내가 가장 형편없는 분야잖아. 내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구하겠다고 설레발치던 가엾은 내 동생을 어떻게 했는지 잊어먹은 모양이지?”
그리고 너의 형제들이.
“딘.”
딘은 다시 술을 한 모금 삼켰다.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눈시울도 따끔거렸다.
“거창한 도움을 바라는 게 아닐세. 그저 자네가, 우리에 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인간이기에 부탁하는 거네.”
생사고락을 함께 한 동지로 여기기엔 카스티엘이 속한 곳이 너무 멀고, 감정 없는 천상의 피조물로 여기기엔 너무나도 많은 것을 함께
겪었다. 이 복잡한 관계를 뭐라 설명해야 할까. 딘은 아마도 그의 부탁을 들어줄 것이다. 카스티엘은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몇
안되는 샘과의 연결고리이므로. 동생과 맞바꾼 이 애틋한 세상 속에서, 아이러니하지만 딘이 냉정한 감정으로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므로.
“은총을 잃어버린 천사를 발견하거들랑 나를 불러주게. 은총을
더럽힌 천사를 발견하거들랑 분노하지 말고 나를 불러주게. 그들과 칼을 부딪지 말고 설득해 주게. 천국이 그대들을 필요로 한다고,
형제들이 그들을 부르고 있다고 말해 주게. 방탕한 형제들이 제 집으로, 아버지와 다른 형제들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게.”
그리고 카스티엘 역시, 딘의 부탁을 들어줄 것이다. 처음에는 거절하고 부인하고 설득하려 들겠지만 결국에는 언제나처럼, 연민은 천사의 이성을 압도할 것이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딘은 귓전에서 울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차분하다는 데 충격받았다. 원한다면 그는 카스티엘의 면전에 대고 천사들을 향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증오와 욕설을 쏟아부을 수도 있었다. 딘은 아직도 재커라이어를 너무 편하게 보내버린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윈체스터 형제를 쌍으로 우롱하고 허무하게 사라져버린 미카엘의 심장을 루가루처럼 씹어먹고 싶었다. 오, 애나. 깜찍한 배신자
아가씨와 비열한 배신자 우리엘. 이미 사라진 그들 모두를 악마에게 먹잇감으로 던져주고 처참하게 몸부림치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딘은 그리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저 자신의 약점을 노출할 뿐. 그는 그들에게 얕보이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은, 아직은 안 된다. 모든 준비를 갖출 때까지는.

“말해 봐, 카스티엘. 내가 어째서 네 거지같은 형제들을 도와야 하는 거지?”

카스티엘이 딘의 손에서 술병을 받아들더니 하루종일 바에서 죽치는 술꾼처럼 익숙하게 고개를 뒤로 젖히며 꿀꺽였다. 그리곤 소파에서 일어나 옆에 개켜놓은 양복을 집어들고 먼지를 털었다.

“내가 자네에게 기회를 줄 테니까.”
“무슨 기회?”

딘이 비아냥거리는 투로 물었다. 카스티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코트 소매에 팔을 꿰었다.

“나는 기회를 만들 수 있을 뿐, 설득할 수는 없다. 설득은 자네 몫이지, 딘.”
“누구를 설득해? 뭘?”

카스티엘은 고개를 돌리고 그 푸른 눈으로 딘을 똑바로 주시했다.
“네 동생.”

“뭐?”
 
그러나 딘이 되물었을 때, 그가 마주한 것은 허공뿐이었다. 휑한 방 한가운데 공기가 소용돌이쳤다. 딘은 주먹을 쥐고 이미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는 천사를 향해 가슴 깊이 모아두었던 천상을 향한 모든 욕설과 악의를 아낌없이 퍼부었다.

“씹어먹을 천사 새끼, 그게 무슨 소리야, 카스티엘! 당장 돌아오지 못해?! 방금 그게 무슨 소리냐고! 야 이 지옥불에 튀겨 꼬챙이에 끼워 먹어도 시원찮을 새끼야!”
 

카스티엘은 어두운 주차장 한쪽 구석에 서서 딘의 고함소리를 들었다. 부질없는 분노를 아무곳에나 퍼붓는다는 점에서 윈체스터 가의 큰
형님은 예전과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그는 과거를 떠올리며 무심코 미소지었고, 곧 보이지 않는 시선을 피해 표정을 가다듬었다.

카스티엘은 고개를 돌려 어깨 너머를 돌아보았다. 길 건너 어둑한 노란빛 가로등이 깜박거리더니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꺼졌다. 암흑이
도로를 지배했다. 그러나 아무리 육신을 입었다 한들 천사에게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해 굳이 조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카스티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딘은 아직도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있었다. 후덥지근한 바람에 실려온 목소리가 코트 자락을 날려보냈다. 카스티엘은 컴컴한 가로등을 향해 고개를 넌지시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누가 누구를 설득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가로등 아래 검은 그림자가 천사를 비웃었다.
천사는 무표정으로 화답하며 천상으로 사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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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natural] The End

[#M_5시즌 피날레를 먼저 보시길|less..|
집은 죽어 있었다. 무엇 하나 숨쉬지 않았고, 무엇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하늘 높이 떠 있는 보름달도 차마 창 안을 굽어보지 않았고, 정원의 귀뚜라미 한 마리도 감히 노래하지 않았다. 공중에는 미세한 금빛 먼지 한 점이 멈춰 서 잠들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돌아오지 않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생명과 움직임과 시간을 멈춘 채, 영원히 다시 오지 않을 그를 기다렸다.

그때 그 적막한 공간 한가운데 영구히 지속될 듯한 평형을 깨트리며 불쑥 그림자 하나가 내려 앉았다. 커다란 날개처럼 퍼덕이던 코트 자락이 이윽고 얌전히 그 끄트머리를 접자, 그림자의 주인은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집 안에서 유일하게 끈덕진 목숨을 부지하며 구차한 빛을 발하고 있는 스탠드가 놓인 책상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는 발을 멈추고 아련한 눈빛으로 책상 위를 훑었다. 낡고 초라한 책상의 주인은 마지막 순간의 흔적을 적나라하게 남겨 놓았다. 한 때 버번이 담겨있던 술병은 텅 비었고 톡 쏘는 강한 알코올 냄새는 시간과 함께 그 안에 얼어붙어 영원히 오지 않을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컵 바닥에는 아직 몇 방울의 갈색 액체가 남아 기약없는 미래를 갈망했다. 깔끔하게 쟁여놓은 한 무리의 종이더미는 깨알같은 검은 글씨를 뽐내며 돌아와 어루만져 줄 손길을 기다렸다.

그는 스탠드 불빛 아래 노란 빛을 깜박이고 있는 컴퓨터 모니터 위에 마치 축복이라도 하듯 한 손을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팟하는 소리와 함께 밝은 화면에 생명이 감돌고, 그 주인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가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THE END, 끝, 결말. 마무리.
 
그는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읽고, 머릿속에 새겼다. 그리곤 섬세한 손을 모니터에서 거두었다.

화면은 다시금 조용히 검은 어둠 뒤로 몸을 숨겼고 컴퓨터는 흡족스러운 듯 마지막 숨을 내뱉으며 짧고 보람찬 생을 마감했다. 이 자리에 없는 주인은 그가 주어진 사명을 다했음을 알고 있으리라. 그리고 이 땅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한 그를 반갑게 맞이해줄 것이다.  

한시도 살아있던 적이 없던 물체로부터 생명을 거둔 그는 무심코 피식 웃었다. 그리곤 정색했다.
눈물이 천사의 것이라면 웃음은 인간과 악마의 전유물이었다. 언제부터 그것에 이리도 익숙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부터라도 그는 과거로, 평온한 상태로, 예전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언제나 똑같은 세계, 결코 변화하지 않는 세계, 그리고 결코 변화하지 않는 자기 자신에게로. 그는 굳게 다짐했다.

그리고는 책상 한쪽 구석에 놓여 있던 종이 한 장을 집어들었다. 작가가 집을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모니터에 담긴 메시지를 다시 한 번 인쇄한 녀석이었다. THE END, 끝, 결말. 마무리.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그 두 개의 단어 위를 가로질러 푸른색 볼펜으로 두 개의 짙고 굵은 선이 거칠게 내갈겨져 있다는 것 뿐이었다. 처음에는 다소 자신이 없다는 듯 조심스럽게, 그리고 두번째 선은 자신있는 태도로 힘있게 꾹꾹 눌러 담아서.

그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고는 그 종잇장을 코트 주머니 속에 구겨 넣었다. 다음은 책상 위에 가지런히 쌓여 있는 종이 무더기를 해결해야 할 차례였다. 여전히 한쪽 손을 코트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그는 반대쪽 손으로 집주인이 남긴 마지막 원고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잠시 후 새하얀 종잇장에서 푸른색 불꽃이 솟아올랐고, 책상 위에는 회색빛 잿더미만이 남았다.  

이제 그는 마지막 임무를 완수했다. THE END, 끝, 결말. 마무리.
그러나 그 위에는 언제든지 푸른색 볼펜으로 취소선이 그어질 수 었었고, 이제 그가 할 일은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주인을 기다리는 이 집처럼, 가슴 속 깊이 희망을 품고, 묵묵히.      

그는 빠트린 것은 없는지 다시 한 번 방 안을 휘 둘러보았다. 그리곤 자비를 베풀어, 마지막 구리선 가닥이 끊어질 때까지 벽 뒤에서 전력을 쥐어짤 각오로 사명에 임하고 있는 스탠드의 스위치를 손가락으로 눌러 끈 다음 두 눈을 감고 허공으로 사라졌다.

+++++++

훗, 크립키 아저씨. -_-+++
이제 바통 터치 실력이나 한번 봅시다.

_M#]

[SuPerNatural 낙서] 성장…………….

LSAT에서 최고 수준의 점수를 기록한 날, 샘은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가 원했던 모든 것이 눈 앞에 놓여 있었고 이제 조금만 더 손을 뻗치면 그는 평생 원했던 모든 것을 쥘 수 있었다. 꿈, 삶, 사랑, 모든 것들을. 어렸을 적 잔인한 듯 보였던 세상은 기실 알고 보면 근사한 곳이었다. 무엇이든 가능한 곳이었다.
샘이 잠시나마 장밋빛 안경을 벗은 것은 친구 딩키가 가족들에 관해 물었을 때였다. 그는 예기치 못한 화제에 순간 당황했지만 잠시 뒤 새 술잔을 홀짝이며 형과 아버지를 떠올렸을 때에는 뿌듯함에 젖었다. 그는 이곳에서 다른 윈체스터 남자들이 평생 해내지 못할 것을 – 특히 형이라면 죽었다 깨어난대도 불가능할 것이다 – 일궈냈고 이로써 생전 처음 그들과 동등해질 수 있었다. 샘은 어쩌면 지금이라면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더이상 철부지 막내둥이 새미가 아니므로. 마침내 식구들에게 관대함을 베풀 수 있는 위치가 되었기에. 

어둠 속의 불법침입자가 형 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가장 먼저 샘을 덮친 것은 당혹감이었다. 딘 윈체스터는 그가 한밤중에 집에서 마주칠 것이라고 기대한 마지막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짧은 충격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가자 그의 감정은 순식간에 날카로운 분노로 변모했다. 딘은 이 곳에 있어서는 안 됐다. 그는 말 그대로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이자 그의 영역을 침범한 약탈자였다.
샘은 평생동안 사냥에 미친 아버지와 형 사이에서 자신이 윈체스터 가의 별종이라 느끼며 살아왔다. 그 자리는 그를 위한 것이 아니었고 그에게 어울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그의 영역이었다. 아버지와 형이 강요한 것이 아닌, 스스로 선택한 자신만의 자리. 이 집과 팔로 알토는 그가 직접 손으로 일군 영토였고 여기에 단 1초도 속한 적이 없는 딘은 멋대로 헤치고 들어올 권리가 없었다. 전혀 없었다.  

그러나 딘이 이빨을 드러내고 씨익 웃어 보였을 때, 샘을 휘어잡은 분노는 눈 녹듯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형이 바보짓을 할 때면 늘 느끼던 짜증스러움 뿐이었다. 그때 샘은 깨달았다. 식구들을 떠나 있던 4년은 결국 부질없는 시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그는 형의 웃는 얼굴 아래서 순식간에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과거로 회귀했다.

샘은 발꿈치로 딘의 등을 내리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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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이 시리즈는 우울할 때 써야 제맛인데, 지금 상태가 그때와 조금 다르다보니 영 분위기가 살지를 않는군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