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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에서


“사바세계로 불리러 갈제 나를 따라 오너라.
멀고도 험하고도 거칠은 길이로다…
가도 가도 또 넘어진다. 넘어졌다 일어선다. 가다 가다 또 넘어진다….
신도 싫고 인간도 싫다. 혼자있고 싶어진다…그때에도 신명께 의지해라”

사이에 있기 때문에 고달프다. 사이에 있기 때문에 애닯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세상, 아예 저 너머의 세상에 있다면 경외이고 공포일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르지 못했고 이곳을 떠나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경계(境界)란, 언제나 경계(警戒,)의 대상인 것이다.

나는 다른 인간들을 이해할 수 있는 당신들이 부럽고 측은하다. 원래 인간이란 그러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들은 무섭고 아름답다. 신을 인간의 경지로 끌어내리기 때문이다.
그렇다. 당신들이 그토록 괴로운 이유는 가해(可解)를 불가해(不可解)의 세계로 데려가는 경계가 아니라 불가해를 가해로 데려오는 경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전쟁의 안개 – Fog of War

젊은 시절 세계 2차대전에 참전하고, 케네디 대통령과 존슨 대통령 아래에서 국방장관을 역임한, 쿠바 사태와 베트남전의 한가운데 서 있었던 로버트 맥나마라의 인터뷰로 이루어진 다큐멘터리.

먼저, 이 인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정보는 모두 이 다큐멘터리에서 얻은 것들 뿐이다.

1. 케네디는 도대체 어떻게 포드 사 사장을 “국방장관”에 기용할 생각을 한 걸까.

2. 지금의 모습을 보더라도, 당신이 왜 그시절 오만하다고 불리웠는지 알 것 같다. 당신은 여전히 오만하다. 좋은 말로 하자면 자신심이 넘친다고 표현해야겠지만 그 정도의 표현으로는 느낌이 부족하다.

3. 그 유연하면서도 확고한 태도와 말솜씨는 과연 그 격동의 세월을 넘어온 정치가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만든다. 스스로 평생동안 지켜왔다고 말하는 두 가지 원칙, “절대로 ‘절대로’라고 말하지 말 것”과 “상대가 던진 질문에 답하지 말고 자신이 받길 원하는 질문에 답하라”에 있어, 당신은 아직도, 심지어 이 다큐멘터리 안에서조차 철저히 따르고 있다.

4. “실수”를 인정하는 것은 좋다. “오류”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좋다. “신념”이 틀렸었음을 밝히는 것은 좋다. 세상에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작자들이 아직도 수두룩하니까. 그런 점에 있어서, 당신의 성실성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당신이 말했듯, 나는 그 시절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방향성이 다르다. 그 시절을 직접 겪으면서도 위에서 내려다본 자와, 보고 들은 적밖에 없지만 그것을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있는 자는, 시선의 마지막은 한 점에 모일 수 있을 몰라도 그것이 지나가는 길은 결코 만나지 못한다. 그래서 베트남과의 회견장에서 주먹다짐이 오고갈 정도로 험악한 수준에 이르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이 영화를 보게 될, 보았을 젊은 세대의 미국인들과 나의 차이이기도 하다.

5. 그나마 전쟁에 대한 책임 부분에서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다물어버린 점에 있어서는 인간적으로 이해하도록 노력중이다. 전쟁은 “누군가”의 책임이라고 할 수 없으니까. 당신의 말대로, 당신은 전범이니까.

하지만 나는 당신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는다. “never”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absolutely”라고 말하는 것 또한 위험하기는 매한가지니까. 후회 안에 또아리틀고 있는 변명, 변명 안에 대가리를 치켜든 자존심. 냉정한 말투 속에 간혹 흔들리는 눈빛과 인간적인 갈등 사이 또렷히 비치는 절제력. 비록 지금은 많이 약해졌다고 해도, 당신은 여전히 무서운 인간이다.

왠지 모르게 찝찝하다. 1인칭의 오류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낸 것일지도 모른다.

천리마 축구단 & 어떤 나라

이왕 결심한 김에 한꺼번에 처치하고 돌아왔습니다. 참고로 하이퍼텍 나다에서는 한 영화의 티켓을 가지고 올 경우 다른 한 영화를 2천원 할인해주는 행사를 하고 있으며, KTF 카드가 있으면 2천원 더 할인받을 수 있답니다. [선전, 선전!]

처음 영화관에 들어섰을 때는 조금 황당했는데, 보통의 영사실에서 상영을 하는 게 아니라 좌석 중간에 프로젝터를 놓고 직접 스크린에 쏘아올리는 방식으로 상영하거든요. 노란 테이프로 좌석 몇 개를 둘러놓았고 “상영에 방해가 되니 여기에는 앉지 말아주세요”라는 사인이 붙어있더군요.



“천리마 축구단”의 경우는, 개인적으로 66년 북한 축구단의 팬이라는 영국 출신의 대니얼 고든 감독이 세계 최초로 북한 내부에서 촬영을 허가받은 다큐멘터리로, 1966년 8회 월드컵 대회에 출전해 8강에 올랐던 북한 축구 선수들을 다룬 영화입니다. 군데군데 나오는 “위대한 수령 동지”와 “거룩하신 은혜”가 귀에 거슬리긴 하지만, 스포츠를 다루었기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유쾌하고 즐거웠어요. 영화 속에서 이탈리아 전 때 골이 터지는 순간에는 관객들이 탄성을 지를 정도였지요. 저는 축구나 월드컵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지난번 월드컵 때 북한 팀이 아시아 최초로 월드컵 8강에 올랐다더라…하는 이야기를 이탈리아 전 때야 비로소 접했지만, 당시의 상황을 담은 필름을 보니, 뭐랄까….스포츠라는 게 얼마나 ‘감동적인 드라마’인지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더군요. [아니, 영국 축구팬들이 유난스럽다는 점도 감안해서요. -_-;;;;] 다큐멘터리에서도 나옵니다만, 1966년이면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0년, 한국전쟁이 끝나고 겨우 13년 남짓인데, UN군으로 참전했던 국가에서 단 한번의 축구 경기로 적대국에 대한 이미지를 반전시켰으니 말입니다.

 
반면 “어떤 나라”는, 북한의 매스게임에 참여하는 두 소녀에 대한 이야기인데, “천리마 축구단”보다 조금 더 심각합니다. 촬영 시기는 나중이지만 사정상 이 영화를 먼저봤는데 현저하게 차이가 나더군요. “천리마 축구단”은 스포츠를 “중심”으로 접근했지만, “어떤 나라”는 집단체조[매스게임]을 일종의 매개체로 이용하여 북한 주민들의 생활상에 좀 더 가깝고 깊숙히 파고 들어갔거든요. 따라서 “천리마 축구단”이 개인적인 이야기라면 “어떤 나라”는 집단의 이야기, 공산국가이자 독재국가 북한의 이야기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무서웠습니다. 교육의 힘이란 정말 놀랍더군요. 처음부터 소름이 끼쳐서 눈물이 마구 쏟아질 정도로…..끔찍함과 연민과 감탄이 뒤섞여서 말이죠. 똑같은 모습,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에 저 자리에 자신을 대입하는 일이 “너무나도” 어렵지 않았습니다. 만약 제가 저 아이였더라면 집단체조는 아니더라도 다른 분야에서 비슷한 말을 하고 있겠지요. 가슴에 그 분의 뱃지를 달고, 그 분 앞에 서는 것을 평생의 꿈으로 삼고, 모든 것은 미제국놈들 탓이며, 우리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인간의 정신이란 그렇게 나약하되, 한번 형성되면 너무나도 강인하여 깨어 부술 수 없는 거죠.

아무래도 자료가 부족해서인지, 6.25 전쟁때의 자료화면이나 북한 시가지의 촬영분은 두 영화가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음악도 한두군데는 비슷한 느낌이 들더군요. 그건 아리랑을 비롯해 그쪽 노래가 워낙 많이 쓰여 그런 듯 합니다만.

“천리마 축구단”이 시합에 나설 때마다 오버랩되는 어린아이들의 음악 및 춤 공연 모습은 마음에 드는 편집이었습니다. 내용과 잘 어울리기도 했고요. 그들은 모두 “조국을 위해 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거든요.

“어떤 나라”의 경우는, 어느 면에 있어 역시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웃음이 번지더군요. “연습 가기가 너무 싫어서 땡땡이쳤다”라든가, “할머니는 너무 엄해서 싫다”라든가, “언니가 군대갔는데, 내 방 생겨서 좋다”라든가. ^^* 하지만 20일의 공연을 위해 6개월을 소요하는 집단체조 연습 때가 되면 이 11살, 13살 소녀들의 얼굴은 진지함 그 자체가 됩니다. 신념과 목표라면 그 어느 체조선수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말이죠. 그리고 그 헌신이 “집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건, 정말 무시무시한 일이에요.

……뛰고, 구르고, 날고…하는 동작들을 야외 바닥에서 하는 걸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애들 죽일 일 있습니까. 안그래도 아이들의 영양실조가 전국가적인 문제라고 하는 판에. 13살짜리 애가 벌써부터 등의 고통을 호소하더이다. 제길. 하지만 그 공연 모습은…..다들 인간이 아니더군요. 그 많은 숫자가 단 한번의 실수도 하지 않을 수 있다니, 그게 가능하더라구요. ㅠ.ㅠ

4년에 걸친 교섭 끝에 “천리마 축구단” 을 찍었고, 그 후 호감을 얻어 “어떤 나라”를 촬영했고…….라고 하는데, 확실히 카메라는 “선택받은 이들” 밖으로는 나가지 못합니다. 영화 내에서도 평양은 일종의 선전 도시라고 말하고 있고, 다큐멘터리 속의 사람들은 어쨌든 선전에 용이한 사람들입니다. 분명 그 바깥에서는 지금도 사람이 죽어가고 있을 것이고, 평양에 사는 선택받은 사람들이 생일날 강냉이죽 한사발을 먹었을 그 고난의 시기에 저 너머는 얼마나 끔찍한 상황이었을까요. 공산주의에서 평등의 테두리란 어디까지 통용되는 것일까요.

하루 다섯시간 공영 방송만 나오는, 수령님을 위해 3년 연속 집단체조에 참가한 보답으로 하사받은 텔레비전, 국영 아파트 부엌마다 설치된, 볼륨을 줄일 수는 있지만 끄는 것은 불가능한 라디오…….하지만 우리도 한 때는 “천리마 축구단이 북한으로 돌아간 후 숙청당했다”는 소문과 “광주에서 빨갱이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를 사실로 알고 살았고, 저 자신만 해도 초등학교 시절에는 “머리에는 뿔이 달리고 손톱에서는 피가 떨어지는 북한 군인”의 모습을 반공 포스터에 그렸지요. 김일성 주석이 죽었을 때 온 나라가 눈물바다가 된 것과,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을 때 태극기를 흔들며 펑펑울던 사람들은, 어디가 다른 걸까요.

저라는 인간이 원래부터 아무것도 완전히 믿지 않으며 절대로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숭배’할 수 없는 성격이기에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제게는 그 대상이 무엇이든, 김일성이든, 김정일이든, 박정희든, 혹은 더 나아가 예수든 부처든[네네, “신”으로 승격하신 “인간들” 말입니다.] “무조건적인 숭앙”은 어리석게 느껴집니다. 물론 저건 그중에서도 최고로 “극단적”인 모습이지만요. 그 좁은 세상에서만 살아왔고 달리 또 무엇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똑같은 교육만을 받아왔기에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저는 확실히 그렇지 않고, 그들도 곧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요즘 다큐멘터리를 자주 보게 되는군요. EBS에서 방영한 영화들을 거의 놓쳤는데, 이렇게라도 공급받을 수 있어 기쁩니다. 그러고보니 외국인들, 정말 많이 보러 오던데요. 남한 사람들도 많이 보러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가 누구의 책임인가?


한 장의 사진이, 한 편의 영화가, 한 권의 책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 아주 작게, 그러나 점점 커다랗게 사람들의 바람을 타고.

수퍼사이즈 미는 상당히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다. 물론 그 재미를 영화관을 나온 다음부터 잊어버리면 곤란하겠지만. 두 명의 뚱뚱한 소녀가 패스트푸드 점을 자신들의 비만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고소한 후, 감독은 과연 패스트푸드가 그러한 효과가 있는지를 밝혀내기 위해 인간 마르모트를 자처하고 나선다. 하루 세끼, 무조건 맥도널드 식사. 운동량은 미국인의 평균치 청도. 실험을 시작했을 때 평균 미국인보다 훨씬 탄탄하고 바람직한 건강 상태에 있던 그는 한달만에 몸무게와 폴레스테롤 수치, 혈압이 무서울 정도로 증가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날린다. 왜 그렇게 많이 공급해야 하는가? 적어도 음식물의 양을 줄인다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선댄스 상영후, 미국 맥도널드는 메뉴에서 수퍼 사이즈를 없앴다. 그리고 영화와 이 조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논평을 덧붙였다.

이정도면, 영화가 사회를 바꿀 수도 있다는 아주 훌륭한 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얼굴을 찡그려가며 이 영화를 보면서도 나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 있다. 웬만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담배가 몸에 좋지 않다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패스트 푸드도 몸에 좋지 않다는 사실을 모두 다 알고 있지 않을까? 알면서도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과연 그 책임을 업체 측에만 넘겨도 되는 것일까? 담배갑 위에 경고 문구를 써 넣어도 아직도 수 많은 사람들이 담배 회사를 고소하고, 컵에 ‘내용물이 뜨거우니 조심하세요’라는 문구를 집어넣어도 여전히 개인이 이기는 사회가 아니었던가? 그러한 상황에서 개인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당신은 저런 광고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도 못하며, 혹 판단하더라도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거부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머저리입니다.”라고 인정해주는 사실이 아닐까? 물론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와, 광고와, 로비를 통한 정치가들의 행태에 책임이 완전히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강요당했을 때,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그리고 그러한 선택을 제대로 할만한 교육을 받지 못하거나 능력을 발휘할 수 없을 때, 이 모든 경우가 어느정도는 해당될지도 모른다.

그, 책임의 선은 대체 어디에 그어야 하는 걸까?

확실히, 약자와 강자가 부딪쳤을 때는 약자에게 좀 더 많은 무게와 힘을 실어주는 것이 어찌보면 공정하고 옳은 처사라 할 수 있다. 커다란 덩치는 게릴라전에 약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당신들도 자신의 책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결국 져 버릴거야.

덧. 사실 감독의 여자친구는 귀여우면서도 사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건강을 위해 채식을 하라니. 그런 바보같은 이야기가 대체 어디있단 말인가. -_-;;;; 인간이란 원래 잡식성 동물이라고!!! 그래도 저 인간들은 자기 한몸 위해서라는, 솔직한 이유라도 있지. 인도주의적 측면에서 채식을 강요하는 인간들은 최악이다. 동물을 먹는 것과 식물을 먹는 것 역시, 생물을 먹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_-;;; 원래 생명이란 다른 생명을 죽임으로써 그것을 담보로 유지해 나가는 법이다. 함부로 자연의 고리를 끊으려고 굴지 마라. 당신들은 생태계의 법칙을 무시하고 있다. 나도, 몸이 가득찰만한 공간 하나를 겨우 남겨두고 먹이기만 해서 키운 닭이나 돼지를 생각하면 꽤나 끔찍하다. 하지만, 그러한 가축들을 아무리 넓은 곳에 편안하고 즐겁게 키운들, 그것 역시 먹기 위해 기르는 것이라면 뭐가 다르지? “스트레스를 받지 않은 좋은 고기를 먹고 내가 건강해지기 위해 식용 동물들의 정신건강을 생각해서 기른다는 것”이 과연 인도주의적인 일인가?
무엇이든, 극단은 위험하다. 인간들은 그 사실을 항상 잊어버리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