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마 축구단 & 어떤 나라

이왕 결심한 김에 한꺼번에 처치하고 돌아왔습니다. 참고로 하이퍼텍 나다에서는 한 영화의 티켓을 가지고 올 경우 다른 한 영화를 2천원 할인해주는 행사를 하고 있으며, KTF 카드가 있으면 2천원 더 할인받을 수 있답니다. [선전, 선전!]

처음 영화관에 들어섰을 때는 조금 황당했는데, 보통의 영사실에서 상영을 하는 게 아니라 좌석 중간에 프로젝터를 놓고 직접 스크린에 쏘아올리는 방식으로 상영하거든요. 노란 테이프로 좌석 몇 개를 둘러놓았고 “상영에 방해가 되니 여기에는 앉지 말아주세요”라는 사인이 붙어있더군요.



“천리마 축구단”의 경우는, 개인적으로 66년 북한 축구단의 팬이라는 영국 출신의 대니얼 고든 감독이 세계 최초로 북한 내부에서 촬영을 허가받은 다큐멘터리로, 1966년 8회 월드컵 대회에 출전해 8강에 올랐던 북한 축구 선수들을 다룬 영화입니다. 군데군데 나오는 “위대한 수령 동지”와 “거룩하신 은혜”가 귀에 거슬리긴 하지만, 스포츠를 다루었기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유쾌하고 즐거웠어요. 영화 속에서 이탈리아 전 때 골이 터지는 순간에는 관객들이 탄성을 지를 정도였지요. 저는 축구나 월드컵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지난번 월드컵 때 북한 팀이 아시아 최초로 월드컵 8강에 올랐다더라…하는 이야기를 이탈리아 전 때야 비로소 접했지만, 당시의 상황을 담은 필름을 보니, 뭐랄까….스포츠라는 게 얼마나 ‘감동적인 드라마’인지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더군요. [아니, 영국 축구팬들이 유난스럽다는 점도 감안해서요. -_-;;;;] 다큐멘터리에서도 나옵니다만, 1966년이면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0년, 한국전쟁이 끝나고 겨우 13년 남짓인데, UN군으로 참전했던 국가에서 단 한번의 축구 경기로 적대국에 대한 이미지를 반전시켰으니 말입니다.

 
반면 “어떤 나라”는, 북한의 매스게임에 참여하는 두 소녀에 대한 이야기인데, “천리마 축구단”보다 조금 더 심각합니다. 촬영 시기는 나중이지만 사정상 이 영화를 먼저봤는데 현저하게 차이가 나더군요. “천리마 축구단”은 스포츠를 “중심”으로 접근했지만, “어떤 나라”는 집단체조[매스게임]을 일종의 매개체로 이용하여 북한 주민들의 생활상에 좀 더 가깝고 깊숙히 파고 들어갔거든요. 따라서 “천리마 축구단”이 개인적인 이야기라면 “어떤 나라”는 집단의 이야기, 공산국가이자 독재국가 북한의 이야기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무서웠습니다. 교육의 힘이란 정말 놀랍더군요. 처음부터 소름이 끼쳐서 눈물이 마구 쏟아질 정도로…..끔찍함과 연민과 감탄이 뒤섞여서 말이죠. 똑같은 모습,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에 저 자리에 자신을 대입하는 일이 “너무나도” 어렵지 않았습니다. 만약 제가 저 아이였더라면 집단체조는 아니더라도 다른 분야에서 비슷한 말을 하고 있겠지요. 가슴에 그 분의 뱃지를 달고, 그 분 앞에 서는 것을 평생의 꿈으로 삼고, 모든 것은 미제국놈들 탓이며, 우리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인간의 정신이란 그렇게 나약하되, 한번 형성되면 너무나도 강인하여 깨어 부술 수 없는 거죠.

아무래도 자료가 부족해서인지, 6.25 전쟁때의 자료화면이나 북한 시가지의 촬영분은 두 영화가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음악도 한두군데는 비슷한 느낌이 들더군요. 그건 아리랑을 비롯해 그쪽 노래가 워낙 많이 쓰여 그런 듯 합니다만.

“천리마 축구단”이 시합에 나설 때마다 오버랩되는 어린아이들의 음악 및 춤 공연 모습은 마음에 드는 편집이었습니다. 내용과 잘 어울리기도 했고요. 그들은 모두 “조국을 위해 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거든요.

“어떤 나라”의 경우는, 어느 면에 있어 역시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웃음이 번지더군요. “연습 가기가 너무 싫어서 땡땡이쳤다”라든가, “할머니는 너무 엄해서 싫다”라든가, “언니가 군대갔는데, 내 방 생겨서 좋다”라든가. ^^* 하지만 20일의 공연을 위해 6개월을 소요하는 집단체조 연습 때가 되면 이 11살, 13살 소녀들의 얼굴은 진지함 그 자체가 됩니다. 신념과 목표라면 그 어느 체조선수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말이죠. 그리고 그 헌신이 “집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건, 정말 무시무시한 일이에요.

……뛰고, 구르고, 날고…하는 동작들을 야외 바닥에서 하는 걸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애들 죽일 일 있습니까. 안그래도 아이들의 영양실조가 전국가적인 문제라고 하는 판에. 13살짜리 애가 벌써부터 등의 고통을 호소하더이다. 제길. 하지만 그 공연 모습은…..다들 인간이 아니더군요. 그 많은 숫자가 단 한번의 실수도 하지 않을 수 있다니, 그게 가능하더라구요. ㅠ.ㅠ

4년에 걸친 교섭 끝에 “천리마 축구단” 을 찍었고, 그 후 호감을 얻어 “어떤 나라”를 촬영했고…….라고 하는데, 확실히 카메라는 “선택받은 이들” 밖으로는 나가지 못합니다. 영화 내에서도 평양은 일종의 선전 도시라고 말하고 있고, 다큐멘터리 속의 사람들은 어쨌든 선전에 용이한 사람들입니다. 분명 그 바깥에서는 지금도 사람이 죽어가고 있을 것이고, 평양에 사는 선택받은 사람들이 생일날 강냉이죽 한사발을 먹었을 그 고난의 시기에 저 너머는 얼마나 끔찍한 상황이었을까요. 공산주의에서 평등의 테두리란 어디까지 통용되는 것일까요.

하루 다섯시간 공영 방송만 나오는, 수령님을 위해 3년 연속 집단체조에 참가한 보답으로 하사받은 텔레비전, 국영 아파트 부엌마다 설치된, 볼륨을 줄일 수는 있지만 끄는 것은 불가능한 라디오…….하지만 우리도 한 때는 “천리마 축구단이 북한으로 돌아간 후 숙청당했다”는 소문과 “광주에서 빨갱이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를 사실로 알고 살았고, 저 자신만 해도 초등학교 시절에는 “머리에는 뿔이 달리고 손톱에서는 피가 떨어지는 북한 군인”의 모습을 반공 포스터에 그렸지요. 김일성 주석이 죽었을 때 온 나라가 눈물바다가 된 것과,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을 때 태극기를 흔들며 펑펑울던 사람들은, 어디가 다른 걸까요.

저라는 인간이 원래부터 아무것도 완전히 믿지 않으며 절대로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숭배’할 수 없는 성격이기에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제게는 그 대상이 무엇이든, 김일성이든, 김정일이든, 박정희든, 혹은 더 나아가 예수든 부처든[네네, “신”으로 승격하신 “인간들” 말입니다.] “무조건적인 숭앙”은 어리석게 느껴집니다. 물론 저건 그중에서도 최고로 “극단적”인 모습이지만요. 그 좁은 세상에서만 살아왔고 달리 또 무엇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똑같은 교육만을 받아왔기에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저는 확실히 그렇지 않고, 그들도 곧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요즘 다큐멘터리를 자주 보게 되는군요. EBS에서 방영한 영화들을 거의 놓쳤는데, 이렇게라도 공급받을 수 있어 기쁩니다. 그러고보니 외국인들, 정말 많이 보러 오던데요. 남한 사람들도 많이 보러갔으면 좋겠습니다.

천리마 축구단 & 어떤 나라”에 대한 8개의 생각

  1. THX1138

    어제 뉴스를 보니 매스게임을 만여명이 하는데 어쩜 애들 얼굴이 하나같이 다 똑같고 흐트러짐 없이 춤을 추는데 무서운 놈들이라는 생각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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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체샤고양이

    저는 북한 다큐나 소개를 보면 너무나 무서워요. 어릴 때, 다섯시에 온 거리에 사이렌이 울려퍼지고, 모두 멈춰서서 태극기를 향해 경례를 해야했던 기억이 떠올라서 말이죠. 그런 걸 그리워하는 인간들이 아직도 많은 걸 생각하면, 역시 남북은 하나군 하는 쓴웃음도 살포시 올라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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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몬드

    획일화된 사회를 만드는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남한은 지금은 그런게 별로 없지만 운동장조회나 국기에 대한 경례도 비슷한 것 같아요. 개인을 그대로 내버려두지못하는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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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lukesky

    THX1138/ 감탄보다는 정말로 ‘무섭다’는 말이 먼저 나오는 광경입니다.
    체샤고양이/ 당시에는 그게 똑같다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했으니 지금이 좀 더 나아진 것 같긴 하지만요.
    몬드/ 흐으, 운동장 조회와 국기에 대한 경례..정말 오래 전 일이네요. 개인과 사회, 혹은 집단의 충돌은 인간인 이상 사라질 수 없는 거라고 보는데[심지어 자연 상태의 동물들에게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니까요], 북한이나 다른 집단의 저런 모습을 보면 정말 끔찍합니다.
    돌.균/ 기회를 만들어. 그냥 혼자가서 보면 된다구…..미안. 네 집이 멀다는 걸 깜박했다. ㅠ.ㅠ
    석원군/ 다음주까지는 분명 하는 것 같았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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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풀팅

    두렵소. 정말 두렵소. 더더욱 두려운 것은 그 상황에 놓였을 때 나 자신도 똑같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 더 두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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