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모로 상태가 안 좋을 때면 항상 되뇌이는 주문
박복하고 힘들긴 하지만 좋아하는 일로 조금이나마 벌어먹고 살고 있고
비바람을 피해 안락하게 지낼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언제나 아낌없이 베풀어주는 부모님과 형제자매가 있고
아무 부담없이 “친구야”라고 불러 만날 수 있는 여자친구들이 있고
“실연 당하면 언제든지 소주에 꼼장어를 사줄테니 일단 연애부터 해라.”는 남자친구들이 있고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지인들이 있고
놀아달라고 보채는 어린 동거묘가 있고
적절히 키운 자존감이 있고
그럭저럭 버틸만한 자존심이 있고
세상에 써먹기 그리 나쁘지 않은 현실감각이 있고
거기서 지탱할만한 상상력이 있으니
이 정도면 행복하지 아니한가.
응, 무슨 일이 생겨도.
이 정도면 덤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행복한 삶이 아닌가.
그러니 이깟 감기와 마감 스트레스 따위 이겨내고 말테다!!!!!!
아놔, 코가 막히면 세상이 멸망할 것 같은 이 기분 뭐냔 말이다! ㅠ.ㅠ
카테고리 보관물: 단상
작은 단상 2
2. 어린시절부터 알고 찾아가던 가족묘가 사라지고, 아버지를 비롯한 친척들의 유해가 가톨릭 납골당으로 옮겨졌을 때[우리 어머니 덕분에] 비록 집안 내에서 아무런 발언권도 없긴 하지만 나는 상당히 아쉬웠다. 하나는 익숙한 과거의 것이 사라진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 집안의 것으로만 인식되던 장소를 떠나 이제는 다른 이들과 매우 사적인 공간을 공유해야 한다는 점에서였다.
가족묘지와 공동묘지의 차이도 크건대, 납골당과의 괴리감은 더더욱 크다. 납골당은 밝은 햇빛아래 풀과 바람이 날리는 야외가 아니라 어둡고 차가운 바닥에 구둣소리가 울리는 곳이며, 작디 작은 돌상자들이 마치 아파트처럼 첩첩히 쌓여 여러 사람이 제대로 이름을 마주보며 서 있기도 힘든 곳이다. 나는 아직도 그 건물에 들어갈 때마다 묘한 위화감을 느낀다. 종교적으로 자라지 못한 나는 어머니를 비롯한 몇몇 친척들이 그 앞에서 기도문을 읊을 때마다 성인들의 이름을 딴 ‘마을’이라고 이름 붙은 기둥들 사이를 돌아다니곤 한다.
나는 한번도 유골이 담긴 그 회색상자들에 인간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일단 내부의 분위기 자체가 엄숙하다기보다는 차가운데다 처음에는 그중 많은 숫자가 비어있었고, 기껏해야 조화로 만든 화환이나 아주 드문 경우 사진이 붙어 있는 경우에나 ‘아, 여기에도 사람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간신히 들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에는 무척 많은 것들을 발견했다. 어린 손녀들이 할머니에게 보낸, 편지지 세 장에 빽빽하게 적어 넣은 일상의 이야기들, 남자의 글씨로 늦게 와서 죄송하다고 적힌, 짧지만 그 후회의 감정이 사무치게 읽히는 포스트잇, 몇년 전 서른 중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간 누군가의 유골 상자 위에 붙어 있는 빈 담뱃갑과 야무진 여자글씨로 적힌 ‘저 결혼해요, 선생님.’ 성경 말씀을 적어넣은 엽서와 카드들, 사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가족들이 마치 보고라도 하듯 붙여놓은 즐거워뵈는 여행 사진들.
그래서 나는 생전 처음으로 납골당이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블로그처럼, 무언가 공통점을 지닌 얼굴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신 혹은 가족들의 사적인 부분을 어느 정도 공개할 수 있는 장소라는 사실을. [물론 이것도 자질이 있는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지만.] 그래서 조금은, 정말로 조금은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직도 ‘가족들이 한데 모이기’ 적당한 장소가 아니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말이다.
신체적 조건의 영향력
의식과 육체의 관계, 안경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안경을 썼고[당시에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것도 지독하게 나빴다. 예전에는 렌즈의 품질이나 도수도 그리 다양하지 않아 두번째 줄에 앉았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앞에 있는 칠판 글씨가 보이지 않아 산수 쪽지시험을 볼 때면 교단 앞에 나가 문제를 베껴야 할 정도였으니까.
그 때문인지 나는 거울을 거의 보지 않는다. 거울이란 주로 화장실에서 안경을 벗고 들여다보는 것이며 그래서 내게는 그리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이의 지극정성 노력 끝에 나이가 들면서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20대 후반이 될 때까지도 외모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내가 가장 신기하게 여긴 것 중 하나는 콘택트 렌즈를 낄 때 많은 사람들이 거울을 들여다 본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아무 것도 안 보일 텐데 도대체 왜?라고 생각했던 내게 실제로 사람들이 그 거울의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낯설고, 내가 이상하게 생겼다는 느낌을 받는다. 못생겼다는 게 아니다. 그저 낯설고 신기한 거다. 아무래도 정상적인 생김새는 아닌 것 같다. 평소에 내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팔, 다리 등은 익숙하건만 얼굴만은 이상하다. 그것이 몸에 붙어있다는 전체적인 모습을 상상하지 못한다. 거울을 볼 때에는 내가 이렇게 생겼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이후에는 잊어버린다. 나는 내가 정확하게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 가끔 남들의 말을 듣다보면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 그들이 보는 나는 내가 보는 나와는 많이 다른 것 같아서.
나 자신에 대한 이러한 감각은 타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나는 사람들을 제대로 알아보거나 기억하지 못하며 특히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세세한 면을 알기 위해서는 그들의 얼굴에 내 얼굴을 가까히 붙여대고 찬찬히 살펴야 하는데 그게 어디 사회에서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누군가에게 “방학 동안에 예뻐졌구나”라고 말했더니 옆에 있던 애가 “쟤 쌍커풀 수술했잖아.”라고 말한 적도 있다. 난 걔 눈에 쌍커풀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지 못했다. 나는 사람들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
이러한 것이 반복되면 가시적인 것을 넘어 성격 그 자체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나는 사람들 간의 미묘한 신호를 쉽게 포착하지 못한다. 내 손짓과 반응은 매우 크고 과장되어 있다. 주위 환경이 보이지 않으니 처음부터 신경을 아예 쓰지 않는다. 폭넓은 주의력과 관찰력이 부족하다. 내 눈에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으니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선에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청각이라는 감각을 차단하면 눈을 뜨고 있어도 현실에서 완벽하게 괴리되어 내부로 침전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어렸을 때부터 “놀라운 집중력”이라는 소리도 간간히 들었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내가 ‘현실’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꾸준히 주지시켜야 했다. 전체적으로 뿌옇고 희미해 보이는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현실감각을 극심히 해치며, 커다란 화면이나 뚜렷한 문자 속의 세상을 보다 가깝게 받아들이는 경향을 부추긴다. 조금만 상상력을 발휘하면 피부에 닿을 정도로 현실적인 비현실 속에 머물다 어딘가 몽롱하고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현실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쪽이 진짜인지 알 길이 없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내 감상문에는 “그러나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현실로 돌아와야 해.”라는 문구가 강박적일 정도로 반복해서 등장한다.
나는 아직도 그 주문을 애용한다. 지하철 계단을 한 발짝 내려갈 때마다 발 아래가 안개 낀 아지랭이처럼 흐릿하니 멀리 떨어진 공간처럼 보이는 건 현실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나 자신을 3인칭 작가가 주인공을 내려다보듯 평가한다. 멀리서 나를 바라보다가 문득 그게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현실과 비현실을 뚜렷하게 구분짓는 것은 오직 고통 – 정신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 뿐이며, 나는 그것을 피하고 예방하기 위해 현실로 돌아온다. 현실은, 딱 그 정도면 족하다.
우스운 점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현실주의자에 더 가깝다는 것이지만.
자폐증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나 역시 강도가 약하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자폐증 기질을 가지고 있는 게 맞는 듯 하다. 입에 늘 달고다녔던 말이 “용납은 하지만 이해는 못한다”였으니까. [친구들은 그것이 대부분의 사람들과 반대되는 사고방식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교육’과 ‘습관’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모른다. 그것과 무심함을 활용하면 무의식까지도 속일 수 있는걸.
배우 장진영 사망
…좋아하는 배우였는데.
안타깝고 안타깝고 안타깝다.
명복을.
후우, 정말 사망소식이 끊이질 않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