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원래 기대라는 게 거의 없는 놈이긴 합니다만,
굉장하군요. 선풍을 일으킬만 합니다. 시대가 변화하면 관객들의 성향과 선호 양상 또한 변화하는 게 당연합니다만, 적어도 근래에 나온 수퍼영웅물 가운데서는 단연코 최고입니다. 게다가 이건 “배트맨”이기에 가능한 해석과 가능한 영화라 더욱 의미가 큽니다. 더구나 전 “비긴즈”를 그저 그렇게, 약간 실망스럽게 본 사람이라 더더욱 기쁘군요.
일단 저야 팀 버튼의 팬이기도 하고 가장무도회같은 “배트맨 리턴스”를 가장 좋아합니다만, 이건 그냥 종류와 장르가 다릅니다. “리턴스”가 화려한 색채의 코믹스라면, “다크나이트”는 느와르 그래픽 노블이랄까요. 제일 멋진 건, ‘캐릭터’들을 하나같이 정말 제대로 써먹었다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투페이스에게 감명받았습니다. 토미 리 존스 씨를 생각하면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리는군요. 사실 조금만 생각하면 변화 과정이 참 찌질하고 감정적인데, 영화 내에서 그걸 아주 스물스물 잘 피해 넘어갔어요. [조커의 빛이 너무 강해서 스리슬쩍 묻어간 감도 있습니다만] 엄밀히 말해 “다크나이트”인 배트맨의 대척점에 서 있는 건 조커가 아니라 화이트 나이트인 하비 덴트 검사니까요. 투페이스라는 캐릭터가 이만큼이라도 설득력이 없었더라면 영화는 눈에 띄는 절름발이가 되었을 겁니다. 훌륭한 분장과 더불어 아론 씨의 연기도 정말 좋습니다. 네, 이건 정말 기대하지 않은 발견이었어요. 영화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도 그가 완성되는 투페이스와 조커의 병실 부분이었고요.
[근데 하비 덴트 사진 찾기 힘들구만요. 투페이스 사진은 너무 자극이 심해서리.]
히스 레저의 조커는….훌륭합니다. 안 그래도 예고편에서 잭 니콜슨의 말투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만 크흑, 조커가 쩝쩝거릴 때마다 거의 환희라고 부를만한 만족감이 기어 올라오는데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모르겠군요. 이 조커는 웃는 소리보다 그 쩝쩝거리는 혓바닥이 트레이드마크예요. 초승달 모양으로 찢어진 입과 그 위에 거칠게 덧입혀놓은 붉은 칠, 그리고 그 사이를 날름거리는 붉은 혓바닥.
잭 니콜스의 조커가 섬뜩하게 느껴졌던 가장 큰 이유가 플라스틱 가면과도 같은 경직된 웃는 얼굴이었다면, 히스 레저의 조커는 화장 아래 적나라한 표정이 드러나는 탓에 소위 “광대의 비애”를 절실하게 느끼게 합니다. 이 친구는 너무 감정적이라 ‘섬뜩’하지는 않아요. 머리카락이 늘 땀에 젖어 있다고요!!! 잭 니콜슨의 조커는 그 얼굴처럼 차가웠던 반면, 이 친구는 뜨겁습니다. 드라이아이스라고나 할까요. 말 그대로 “미친 개”라 물리고 싶지 않아 피해다니고 싶은 놈이죠. 잭 니콜슨의 조커는 ‘우는 척’만 할 뿐 사실은 낄낄거리며 진짜로 울지는 않을 것 같은데, 히스 레저의 조커는 방 구석에 혼자서 진짜로 훌쩍거리다가 잠시 후 젖은 눈으로 헤헤거릴 놈이에요. 잭 니콜슨의 조커가 기관총을 갈기는 갱단의 미친 카리스마 우두머리라면 히스 레저의 조커는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웃는 얼굴로 아이들을 유혹해 가족을 몰살시키는, 보다 개인적이고 원초적인 킬러 클라운입니다.
하지만 비교를 하기가 힘든 것이, 팀 버튼의 “배트맨”은 지나치게 팀 버튼스러워서 말입니다. 팀 버튼의 조커는 고담 시의 ‘일부’였거든요. “다크나이트”의 조커는 고담 시를 만들어 나가는 존재고요.
이 조커는 확실히, “악역”으로 보자면 거의 완벽에 가깝습니다. 배트맨은 물론이요, 이쪽 놈이고 저쪽 놈이고 다른 모두를 손바닥에 가지고 놀 수 있는, 머리 꼭대기에 올라 있는 최고의 악당이 탄생했어요. 문제는 그를 다시 볼 수가 없다는 점이죠. 제기랄. ㅠ.ㅠ 어째서 배우들은 이렇게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떠나가는 겁니까. ㅠ.ㅠ
저는 배트맨을 무척 좋아합니다. 음, 그러니까, 조로보다 디에고를 더 좋아하는 제 이상한 성향에 비해, 배트맨과 브루스는 거의 동등한 수준으로 좋아하지요. 그리고 전 배우로서의 베일씨도 매우 좋아합니다. 그런 우울한 포스를 풍기는 젊은 배우[??]는 꽤 드무니까요. 그런데 뭐랄까, 남들 앞에서 연기하는 것이 아닌, 지하 버전에서 가벼워 보이는 브루스는 역시 적응이 안 되는군요. [껄떡대고 뺀질거리는 젊은 백만장자는 그렇게나 잘어울리는데!!!! ㅜ.ㅜ] 미안해요, 크리스찬. 제 마음 속 브루스는 역시 영원히 마이클 씨입니다, 크흑. [하긴, 앞으로 겪을 일들이 있으니 조금 부당한 비교일지도….]
내용상 가장 고민하고 괴로워해야 할 캐릭터는 역시 박쥐 아저씨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스토리에 치이는 바람에 그 부분이 너무 가볍게 다루어졌습니다. 그의 희망이 무너져 내리는 부분이 가장 고통스럽긴 했지만 기대만큼은 아니었어요. 믿어줘야 해요, 베일씨. 전 그런 캐릭터의 그런 독백에 무지 약하거든요. 특히 “배트맨” 아저씨가 그렇게 갈등하고 있으면, 전 뱃속이 뒤틀리는 고통을 느끼며 안달하고 있어야 해요. 고통이 약했어요. 당신은 확실히 커다란 걸 잃지 않았어요. 배트맨이야 워낙 무게 있는 캐릭터니 그렇다 쳐도, 저는 브루스가 좀 더 어둡고 절망스럽게 그려지길 바랍니다. [비긴스에서 한 걸로는 약했다고요, -_-;;;]
이거 일단 주변에 본 사람들이 많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다를 떨던가 해야겠군요. ㅠ.ㅠ 뭔가 할말은 잔뜩인데 꺄악거리기보다는 뭔가 엄숙한 분위기인지라.
여튼, 네, 이 정도면 기대 이상입니다. 그것도 매우. 누군가를 꼬셔 한 번 더 보러가야겠어요.
덧. 그런데 메기 질렌할, 캐리 피셔 씨 닮지 않았습니까. -_-;’;; 저 보면서 계속 에피 4의 레이아가 생각나서 미치는 줄 알았어요. ㅠ.ㅠ
덧2. “비긴스” 때는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놀란 감독님 사랑하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