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별 글 목록: 2019년 3월월

“나를 보내지 마”

삶이란 참으로 아름답고도 덧없는 것이라.

책장이 온통 장르문학투성이였는데
이상하게도 한동안 어떤 책을 잡아도 진도가 안 나갔건만
이 녀석은 붙들고 단숨에 읽어치웠다.
그만큼 흡인력이 출중하다.

성장과 우정, 애증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일종의 미스터리이기도 하며
마지막에는 여기까지 도달한 독자가 숨이 막힐 정도로 마구 질문을 던지는데
그런데도 과연 나의 생각과 의견이 그저 살아갈 뿐인 주인공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은 것이다.

그리곤 그런 나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는 거지.

소설 속 ‘나’는 소설 속 ‘나’를 보는 나만큼이나 관조적이라
계속해서 멀어져만 가는데
그 간극을 좁힐 길은 없고
이 이야기가 아름답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좌절감과 혐오감이 사람을 먹먹하게 만들어.

“겟아웃” (“2017)

기본적인 초반 줄거리에 대한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지만
막연히 갖고 있던 이미지에 비해 훨씬 진지할 뿐만 아니라
긴장감의 고조라는 면에서
현실과 맞물려 그 효과가 정말 굉장하다.

왜 그렇게 화제가 되었는지 알겠어.

일상성에 스며있는 그 거북함과 공포심이
적나라하게 다가와서, 우와.
전에 중요한 키워드 몇 개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데
영화 내내 덫에 걸려 있는 듯한 긴장감이 유지되다보니
그런 판타지성이 거부감이 들거나 방해가 된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것도 대단해.
살아가는 내내 항상 살얼음을 걷는 느낌을 이렇게 표현하다니.

솔직히 기대 이상이었고,
이번에 나오는 같은 감독의 ‘어스’를 꼭 봐야겠다.

“파과”

어렸을 때부터 한국 소설을 많이 좋아하지 않았고
그래서 지금도 그쪽은 잘 모르는 편인데
요즘 조금씩 눈에 띄는 이름들의 작품을 읽기 위해 노력중이다.

작가를 소개받았고 그중에서도 이 소설을 소개받았다.
주인공 때문인지 작가의 나이에 비해 굉장히 옛스러운 글이라
많이 신기하다.

내가 학창시절에 읽었던
나보다 약간 윗세대의 한국식 장르소설이나 드라마를 연상케하는 스토리와 구조라고 해야 하나.
특히 의사에 대해 조금 뜬금없는 주인공의 호의가 그러했고
두 사람의 관계성도 흔하디 흔한 것이고 특히 마지막 혈투는 그 시절의 전형적인 “맞다이”인데
그 주인공이 60대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독특해진다.
이제껏 그 역할은 마초적이고 홀로 고독을 씹는 느와르풍의 아저씨들이 담당했으니까.
내가 이 책을 읽기 전 넷플릭스에서 은퇴에 임박한 킬러 이야기인 “폴라”를 봐서
더더욱 시차없이 비교할 수 있었고.

작가의 다른 글과는 조금 다르다는 평이 있는 것 같아서
다른 작품을 몇 개 더 읽어봐야겠다.

“죽이는 화학”

젠장, 아무리 자기 전에만 읽었단들 이걸 읽는 데 열흘이 걸리다니.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에서 사용된 독극물에 대해 분석 및 설명한 책.
크리스티 팬이라 컨셉이 몹시 마음에 들어 벼르고 있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적극적이고 전문적인 화학책이라 조금 당황했다.

일단 챕터 제목부터 ABC 살인사건에서 따온 거라 재미있었고
이쪽은 하도 오랜만이라 화학식과 반응방식 등이 나올 때마다 눈동자가 마구 돌아가는 느낌이었는데
조금 시간이 지나니 슬슬 익숙해져서
점점 더 익숙한 독극물 이름이 나올 즈음에는 요령이 생기기 시작.

어린 시절 크리스티 작품을 읽으며 독에 대해 생각하거나 상상했던 내용이 떠올라 더욱 흥미로웠고
여러 가지 잡지식들도 조금 늘었다.

예를 들면 고흐가  디기탈리스 중독자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라든가
독극물의 흡수를 지연시키는 데 활성숯이 꽤 자주 사용된다든가
모르핀 류의 수많은 약물들과 화학식이라든가.

자꾸만 내가 알 수 없는 제목들이 튀어나와 이럴 리가 없는데, 하고 뒤져보니
황금가지에서 크리스티 전집을 출간하면서 제목을 원제로 많이 바꿔 번역한 모양이다.
집에 자리가 부족해 해문판으로 만족하고 있었는데 다시 뽐뿌질이 오기 시작했다. 안돼!

읽다보면 정말 다시 크리스티에 대한 애정이 마구 샘솟는 걸 느낄 수 있다.
재미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