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레드포드 사망

Robert Redford, actor, director, environmentalist, dead at 89

로버트 레드포드는 내게 애틋한 인물인데,
태어나서 생전 처음 한 ‘배우 덕질’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중학교 전반에 걸쳐,
“대통령의 음모(All the President’s men)”으로 처음 본 이후로 줄곧
온 동네 비디오방 세 군데를 돌아다니며 필모를 찾아다녔다.
(이 영화 때문에 한동안 기자를 꿈꿨고 오른손잡이 주제에 시계를 오른쪽 손목에 차게 되었지.)

“스크린”과 “로드쇼”를 사 보기 시작했고
선댄스 영화제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며

“코드네임 콘돌”은 한때 일주일에 한 번씩 빌려다 보곤 했고
“브루베이커”에 이상한 애착을 가지고 있으며
“스니커즈” 때 부터는 내 배우가 계속 현역이라는 데 뿌듯함을 느꼈던 것 같다.
이제 과거의 작품을 찾아다닐 필요 없이 미래의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렇게 또 내가 살아 온 한 시절이 떠난다.

 

 

 

 

확실히

자기 글을 쓰지 않으면 표현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걸 새삼 실감 중이다.
아무래도 신체 말단이 점점 둔해지는 게 느껴져 얼마 전 필사를 시작했는데,
남의 글을 베껴 쓰다 보니 그 사실이 점점 더 절실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필사를 시작하고 한 달도 안 돼
색잉크 몇 개와 만년필 두 자루를 더 마련했다.
운이 좋았는지 마침 그 시기에 할인을 하고 있었다.
할인 기간이 끝나고 나니 곧바로 가격이 쑥 올라갔지만.

여하튼 필사책도 생각보다 빨리 소진되어 결국 공책을 샀는데,
내게는 베낄 책이 딱히 많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책이야 많지만 사춘기 때와 달리 이제는 감명받은 문구를 따로 표시해둘 나이도 아니라.

대학교 때까지만 해도 공책과 일회용 만년필을 들고 다니며 뭔가 생각날 때마다 적곤 했는데
한 십년 전쯤 초등학교 시절부터 갖고 있던 모든 일기장을 물에 적셔 찢으며 그 공책들도 떠나 보냈다.
그냥 그때는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내가 불시에 떠나고 나면 남은 것이 없어야겠다는 생각에.

컴퓨터로 뭔가를 쓰면 확실히 속도가 빨라지지만
손글씨로 일기를 적기 시작해야 할까 고민이 되네.
모든 게 결국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느낌이라 기분이 묘하다.
나이들었다는 또 다른 증거 같기도 하고.

“케이팝 데몬 헌터스” (2025)

처음 제작 소식을 들었을 때는 불안했고
트레일러가 나왔을 때는 기대치가 좀 올라갔는데

이런,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고 유쾌했다. 진심 즐거웠어.

게다가 어떤 식으로 케이팝을 접목시킬 거지? 했더니,
뮤직비디오 형식의 뮤지컬 영화를 만들었어!

케이팝의 가장 무서운 점이 ‘어디선가 본 듯한 것들의 짜깁기’인데 그마저도 그대로 연상시켜서 훌륭하다. 솔직히 디자인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노래들이 하나같이 잘 뽑혀서 뮤지컬 영화로서의 정체성을 매우 잘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 표. 난 요즘 나오는 아이돌 노래들을 안 좋아하거든. 장르를 조각조각 해체해서 뜬금없이 여기저기 붙여놓은 느낌이라서. 적어도 이 영화에 삽입된 노래들은 전통적인 팝의 전통을 어느 정도 잇고 있고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이 있는데다 이야기의 진행과도 찰떡같이 연결된다.

한국적인 감성을 과하지 않게 접목시켰다. “소다팝”에서는 공감성수치를 느끼긴 했지만 (캬캬캬캬캬캬캬) 나머지 부분은 이제까지 다른 나라에서 다룬 한국 묘사에 있어 가장 어색하지 않고 훌륭한 것 같아. 역시 보여주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한 듯.

일단 영어판으로 봤는데 진우 성우가 한국 배우라고 해서 놀랐다. 배우인데 더빙을 잘하잖아!!! 감동이로세. 그리고 영어판이 오리지널이기 때문인지 더빙도 좋았어. 크레딧을 보니 정말 한국계 총출동에 호화판이던데.  영화가 꽤 마음에 들어서 시간이 나면 한국판도 볼 생각이다.

무엇보다 까치와 호랭이 최고야. 솔직히 이 둘의 영상을 보고 영화를 틀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겠다. 우아앙, 너무나 사랑스러워. 엉엉엉

“댐즐” (2024)

가난한 나라의 공주님이 머나먼 부자나라 왕자님의 청혼을 받고 가족과 함께 혼인식을 치르러갔으나 실은 용의 제물이 되어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

오, 재미있었다.
고전적인 동화 비틀기일뿐만 아니라
화면이 화려해서 보는 맛이 있었다. 특히 혼례복 입는 장면이 너무너무 내 취향이라 즐거웠는데 나중에 단순히 눈의 즐거움을 위한 게 아니라 스토리적으로 이유가 있음을 보여주는 게 좋았어.

아버지의 등장이 내게는 꽤나 반전이었는데, 비록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뒤늦게 뉘우치긴 해도 사실을 알면서 딸을 팔아 넘겼다는 점에서 동화의 탈을 쓴 이 스토리 안에서는 그런 결말을 안겨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납득했다. 새엄마의 캐릭터도 좋았어. 특히 ‘밧줄 장인의 딸’이라는 세세한 설정이 붙어 있는 부분으로 두 집안의 차이를 뚜렷하게 확인시켜주었고.

내 기억속의 밀리 바비 브라운은 어린아이였는데, 이젠 정말 다 컸구나.
하기야, 난 스칼렛 요한슨도 축구 영화로 처음 접했기에 그가 섹스심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꽤 시간이 걸렸다.

….밀리 바비 제발 스타워즈 성인 레이아 공주 역할로 영화 하나만 찍어주면 안 될까. 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