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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BBC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3부작.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고 보고 싶었는데 왓차에서 발견했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내가 평생 좋아하고 좋아할 작가이고
누가 만드는 어떤 작품이든 어떻게 해석하고 재구성했을지 궁금해져서 계속 손을 대게 된다.

깔끔하고, 속도감도 있다.
찰스 댄스의 판사님은 원작보다 지나치게 우아하고
에이단 터너의 롬바드는 대놓고 섹시함을 무기로 사용하고 있으며
베라 배우의 그 신경질적인 톤도 좋았다.
과거와 현재를 지나치게 대비시키는 게 아닌가도 싶었지만. 베라 클레이턴은 섬세하면서도 대범하고,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크게 어긋나 있어서.

그리고 미란다 리처드슨 무서워….진짜 무서워.
에밀리 브랜트 비중은 크지 않은데 가장 인상적인 인물 중 하나고,
해석도 좋더라.

아마 공중파에 방영한 적이 있었던 걸 왓차에 가져온 모양인지
끊임없이 피워대는 담배가 전부 블러 처리 되어 있는 게 단점.
이건 언제가 되어도 익숙하지 않을 성 싶다.

“제프리 앱스타인: 괴물이 된 억만장자”

정말 오랜만에 넷플릭스.
요즘에는 창작물보다 다큐멘터리를 선택하게 된다.
4부작인데도 수면시간을 희생하면서까지 정신없이 몰아봤다.

제프리 앱스타인에 대해서는 그저 평범하게 돈을 벌어 부자가 되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으나,
역시 인간은 한 가지만 하는 게 아니며,
이미 도덕적으로 파산한 인간이기에 오랫동안 미성년자와 여성들을 착취해왔고
그러한 행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거나 후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이 단순히 억만장자의 개인적인 일탈이 아니라
초반부터 매우 조직적으로 실행되어 엄청난 수의 피해자를 양산했으며
비슷한 계급의 비슷한 괴물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조직범죄다.

그럼에도 그들은 모두 처벌받지 않았고, 앞으로도 처벌받지 않겠지.

솔직히 말하자면 유럽 쪽 컨텐츠에서 한동안 이와 비슷한 창작물이 한동안 쏟아져나온 적이 있었는데,
(미성년 소녀의 죽음, 그 비밀을 파헤쳐보니 부유한 권력자와의 성적 학대 및 착취와의 연결)
당시에는 왜 하필 이런 게 유행이지? 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기를 보건대, 어쩌면 이 사건이 영감을 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번 하비 와인스타인과 미투 사건과 얽혀 알게 되었지만
이미 2000년대 초반에 수사가 있었으니.

권력과 비리와의 유착 때문에 화가 나서
결말을 미리 알고 있지 않았다면 몇 번이고 중단했을지도 모르겠다.
인맥을 포기하지 않는 권력자들, 죽음으로 탈출한 처벌 등
여러 면에서 안희정 및 박원순의 사건을 연상케 하는 지점들이 있다.

“반쪽의 이야기(2020)” – 넷플릭스

넷플릭스에 나오기 전에 줄거리만 듣고 흥미가 생겼던 작품인데
기대 이상이었다.
단순히 사랑과 연애를 말하는 십대 청소년물이 아니라
실은 타인이 아니라 온전한 나를 완성하기 위한 반쪽을 찾는 과정이었고
세 청소년 모두가 나름의 자리에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사랑스럽다.


폴은 기차역 상자 안에 앉아 있는 엘리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대화하지만 거기서 끌어내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건 누구보다 제약된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애스터라는 게 좋았다. 엘리는 똑 부러지지만 실은 늘 머리로 생각하고 분석하는 아이이고, 애스터는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이고 폴은 몸을 움직이는 운동선수라는 점에서 실은 두 사람 다 엘리의 행동력에 영향을 주었지만.

그간 넷플릭스에서 몇 개 봤던 아시아계 미국 십대 주인공들 영화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다. 굉장히 정적인 연출 덕분에 보통 미국식 청춘물과는 약간 느낌이 다른데, 이건 감독이 동양계인 것과도 관련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 분위기 때문에 계속해서 은은하게 눈물이 나게 만든단 말이야. 절제되어 있지만 굉장히 정서적이고, 그게 내 취향과 잘 맞는다.
감독의 전작이라는 “세이빙 페이스”를 봐야겠어.

아, 세 사람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

덧. 엘리 배우인 레아 루이스가 정말 똘망똘망한 얼굴이라 보는 맛이 있었다. 데이지 리들리를 생각나게 하더라고.

“타이거 킹” – 넷플릭스

그닥 취향이 아닐 것 같아서 넘기려고 했는데 하도 시끌시끌해서.

음….뭔가 못볼 걸 본 기분이다.
등장인물 모두가 미쳐있고,
처음에는 그래도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펼쳐지다가
뒤로 가면 갈수록 반전을 거듭하며 점점 더 광기어린 이야기로 치닫는데

거대한 맹수들을 키우는 이들이 비대한 자아를 뽐내기 위해서라는 건 당연해 보이지만
이게 일종의 컬트 조직과, 가스라이팅과, 서로 먹고 먹히는 단계에 이르면
내가 뭘 보고 있는 건지 황당해지는 것이다.

몰랐는데 미국에서 꽤 유명한 사건이었던 모양이다.
한동안 미국 프로그램에 육식 동물 새끼들을 데리고 나오는 사람들이 출연하는 걸 보고
저건 대체 뭐야? 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이유가 있었구나 싶고.

실제로 시베리아 호랑이는 보호종에 멸종 단계인데도 미국에서 저런 족속들이 근친교배를 해 가며 번식시켜 겨우 몇 백만원에 팔아먹고 있다는 사실도 기가 막힌다. 저때까지  아직 법적 규제가 없었다는 것도.

개인적으로 조 이그조틱은 끔찍한 인간이지만 지나치게 감정적인 탓에 저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인지 중간중간 등장하는 바가반 닥 앤틀이라는 자가 제일 무서웠다. 등장인물 가운데 제프 로와 그의 오른팔과 더불어 진짜 사이코패스라고 생각되는 인물. 저런 인간은 또 교묘해서 법에 잡히지도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