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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는 화학”

젠장, 아무리 자기 전에만 읽었단들 이걸 읽는 데 열흘이 걸리다니.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에서 사용된 독극물에 대해 분석 및 설명한 책.
크리스티 팬이라 컨셉이 몹시 마음에 들어 벼르고 있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적극적이고 전문적인 화학책이라 조금 당황했다.

일단 챕터 제목부터 ABC 살인사건에서 따온 거라 재미있었고
이쪽은 하도 오랜만이라 화학식과 반응방식 등이 나올 때마다 눈동자가 마구 돌아가는 느낌이었는데
조금 시간이 지나니 슬슬 익숙해져서
점점 더 익숙한 독극물 이름이 나올 즈음에는 요령이 생기기 시작.

어린 시절 크리스티 작품을 읽으며 독에 대해 생각하거나 상상했던 내용이 떠올라 더욱 흥미로웠고
여러 가지 잡지식들도 조금 늘었다.

예를 들면 고흐가  디기탈리스 중독자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라든가
독극물의 흡수를 지연시키는 데 활성숯이 꽤 자주 사용된다든가
모르핀 류의 수많은 약물들과 화학식이라든가.

자꾸만 내가 알 수 없는 제목들이 튀어나와 이럴 리가 없는데, 하고 뒤져보니
황금가지에서 크리스티 전집을 출간하면서 제목을 원제로 많이 바꿔 번역한 모양이다.
집에 자리가 부족해 해문판으로 만족하고 있었는데 다시 뽐뿌질이 오기 시작했다. 안돼!

읽다보면 정말 다시 크리스티에 대한 애정이 마구 샘솟는 걸 느낄 수 있다.
재미있었어.

큰일났다

한번 각성하면 되돌아올 수 없다더니

정말 여러가지 남녀차별적 요소를 인식하게 되니
할란 엘리슨 책이 안 읽혀.
진도 너무 안 나가네.
대체 책 한 권을 얼마나 붙들고 있을 생각인지. ㅜ.ㅠ

레디 플레이어 원

첫부분은 제대로 된 디스토피아 소설이라서 오, 생각보다 의외인걸,
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작가 이 미친놈아”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렇군. 정말 팬질을 이렇게 할 수도 있구나.
이건 집착을 넘어서, 뭐라고 해야 하나.
이걸 옮긴 역자가 불쌍해질 지경이었어. ㅠ.ㅠ

그런데 확실히 스토리 자체에 긴박감이 있어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마지막 챕터에 와 있었다.
그 정도만으로도 훌륭하지 않은가.
나보다 앞선 세대이긴 해도 내게 익숙한 레퍼런스도 많아 낄낄거리며 읽을 수 있었고. 

아르테미스와의 이야기는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조금 사족처럼 느껴지긴 하는데
작가와 주인공이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한 오타쿠를 기반으로 한다는 걸 생각하면
일종의 메타라고도 여길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넘어갈만 하다.

다만 그놈의 ‘일본문화’에 대한 인식마저 정말 어디다 내놔도 비웃음을 살만한 ‘서양 오타쿠’ 그 자체라… 일본 캐릭터가 나올 때마다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작가여, 주변에 일본계 미국인이 한 명도 없단 말이냐. 내지는 현대 일본 문화도 전혀 찾아보지 않았단 말이냐. 어떻게 그 부분까지 80년대에서 단 한 치도 업그레이드가 안 되어 있는 거지.

끝부분에 카타르시스는 좋았는데 마무리는 미흡하다.
거기서 끝나는 거야? 아니 정말, 여기서 끝난 거냐고?
그럴려면 홀리데이의 마지막 메시지 왜 넣은 거야.
아니 물론 그 주인공이 메시지를 듣고 스위치를 팍 끈다! 고 결정한다면 오히려 캐릭터 붕괴가 맞긴 하겠지만. 그래도 “아, 잘 놀았고, 생각해볼만한 윤리적 메시지도 넣었으니 다 이루었도다.”의 느낌이 강해서 조금 어리둥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