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요즘 얼음집에서 스타크래프트2 한글화 문제로
공방중인 여러 글들을 보고.

가끔 전문용어 또는 신조어가 등장하는 책들을 번역해야 할 때가 있는데
지식이 짧은 나로서는 주변을 수소문해 전공자들을 찾아 물어볼 수 밖에 없다.
그들의 대답은 대개 이렇다.
“어, 그거 한국어 없는데요.”
“그냥 원어 그대로 써요.”

심지어 대학교수들도 그렇다. 원서로 배우고 해외에서 수학한 그들은 종종 정확한 의미를 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기를 조언한다.
“아, 그냥 그렇게 써요. 억지로 옮겨봤자 어색하기만 할 뿐이고.”

그리하여 결국,
5분 전에 이 단어를 처음 접한 비전공자가 전공자에게 새로운 언어를 제안하고
알지도 못하는 한자를 조물딱거려 새로운 전문용어를 만드는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진다.
죄책감이 들더라도 어쩔 수 없다.
전공자들이 아닌 평범한 독자들에게 의미를 내포한 열두음절짜리 영어 단어를 단순히 음역하여 소개하는 건 개인적으로 직무유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러한 일이 워낙 독립적이고 산발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통합되기가 무척 힘들다는 데 있다.

항상 시간의 문제다.
시간이 없는 이들은 그들끼리만 통하는 세계에서 지금 당장 의미를 전달하길 원하고
후대에 남겨야 하는 이들은 천천히 단어에 의미가 스며들어 오래도록 자리잡을 수 있길 원한다.
세계가 더더욱 좁아지고 동시다발적으로 돌아가면서 이 두개의 세상은 점점 더 괴리될 것이다.
어쩌면 ‘장기적’이라는 단어 자체가 사라질지도 몰라.

재미있는 사실은 젊어서 저리 말하던 이들이 나이가 들면 전문용어의 한글화에 오히려 집착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론은 늘 현실보다 한발짝, 아니 여러 발짝 늦게 진행될 수 밖에 없다. 이미 오래 전 고정되어 버렸기에 기존에 게으름을 피운 대가를 또한 곱절로 치루면서. 아마 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래남을 이들, 오래가길 원하는 이들이라면 언젠가는 그 길로 갈 수 밖에 없을 거다.

덧. 그건 그렇고 난 스타는 해 본적이 없지만[그 희귀하다는 대한민국 몇 퍼센트!] WOW의 선례를 사랑한다. 그런 표현들이 소위 ‘중세풍’ 판타지의 본질이니까.
스타워즈 팬이기 때문에 용어의 완벽함을 추구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안다.
그러니 아무리 불만스럽다 해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하는 게 좋을 거야. 언제나 그렇듯이.  

그저”에 대한 20개의 생각

  1. 해명군

    하지만 90년~2000년 사이에 컴퓨터 관련 전공을 들은 사람들은 과도한 컴퓨터 용어의 한글화로 인해 참혹한 일을 겪은 바 있지요.
    전산과라면 누구나 아는 스티븐스의 책을, 패킷을 보쌈으로, 큐를 대롱으로 번역한 무시무시한 판본이 나와 돌아다니는 바람에 ^^(먼산)

    ……..물론 문학작품에 있어서는, 원문을 살리는 것 보다는 우리말로 그 뜻을 갈음할 수 있는 신중한 번역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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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ukesky

      그 ‘과도한’의 선을 어디다 그을 것인지는 장르나 용어를 떠나 모든 곳에서 문제지. 흠, 하지만 저정도면 한글화라기보다 그냥 번역 전반적인 문제 같은데. 그런데 왜 하필 ‘보쌈’이지? ‘묶음’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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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하율

    WOW는 (물론 말도 안 되는 오역이 툭툭 등장하긴 하지만) 번역이 참 센스있죠. 게다가 일부러 더 센스를 살려서 번역하려고 집착(!)하고요. 그런 센스가 참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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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ukesky

      자기들도 재미들린 게야. ^^* 그런데 진짜 고풍스러운 그런 표현들이 판타지 풍과 잘 어울리니까 더욱 좋은겨.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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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에스텔

    반지의 제왕이 생각나네. 골목쟁이, 성큼걸이 등… 엄청나게들 반발했던 번역… 크크… 어색하다! 고유명사를 번역하다니 제정신이냐! 등등…(먼산) 원작가인 톨킨 교수가 번역하래서 했다 해도 인정 안 하더라는;;;
    난 게임은 안 해서 잘은 모르겠지만 십 년 동안 그랬다 해도 그게 외래어가 아닌 외국어이고, 게임 속 명칭이라 해도 일반명사 범주에도 들어간다면 번역하는 게 맞다고 봐. 그 단어가 그 게임만을 위해 만들어진 특수 고유명사가 아니라면 말이지. 물론 한동안 꽤나 어색할 거라는 건 이해되지만…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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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ukesky

      전 ‘성큼걸이’ 보자마자 감탄했는데!!! 사실 골목쟁이는 조금 어색하다고 생각했지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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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에스텔

      솔직히 골목쟁이는 나도 어색해. 아직까지도…크크…
      근데 톨킨교수님의 번역 지침과 해설을 보면 호빗들의 성은 원래 우스꽝스러운 별명이나 지명이래. 그걸 생각하면 골목쟁이는 어색하지만 의미는 맞으니.. 난 골목쟁이가 사전에 등재된 명사라는 것과 그 의미를 얼마 전에야 처음 알았어…;;;

      일부는 톨킨 교수의 지침은 어디까지나 서양어에 해당하는 것이고 동양어까지 염두에 둔 건 아니었을 거라는 주장으로 반대하기도 하는데… 음… 난 어색하더라도 씨앗판 번역본의 편을 들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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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as

    와우는 정말 좋은 선례를 남겼지요. 저랑 용어 번역 문제로 오랫동안 논쟁하던 사람이 와우를 보고 ‘어, 처음부터 이렇게 쓰니 별로 안어색하네?’라고 말했을 때 감동의 파도가 밀려왔던 -_ㅜ

    다만 스타크래프트는 10년 동안 불러온 (정도가 아니라 중계를 하다보니 엄청나게 입에 오르내리고 기사에도 나오고 농담에도 쓰고 신조어까지 만들어온) 용어들이라 더 힘들긴 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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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ukesky

      확실히 처음에 무엇을 접했느냐가 느낌을 크게 좌우하지요. 스타크는 진통이 클 거예요. 팬들 사이에서만이라면 어느 정도 바꿔쓰기가 용이하겠지만 말씀하신대로 중계 라든가 등등의 문제가 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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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나마리에

    갑자기 학부때 들었던 대기과학 시간에서,
    simulation 용어 번역을 서울대하고 우리학교하고 다르게 해서..
    ….. 만나면 싸우니까 되도록이면 그 말은 안 한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군. 헐.
    의대하고 자연대(생물쪽) 쪽하고 mechanism 용어 번역을 또 다르게 하는데, 의대쪽은 ‘기전’ 이과대쪽은 ‘기작’ 그랬거든. (서로 다르게 쓰는 건 의대에서 조교하면서 첨 알게 된 거지만.) 그런데 의대 교수가 그거 가지고 순수과학 쪽 사람들 씹더라. 풋.

    전문용어의 통합은 파벌이 있어서 더 어려워….. 슬프지만.. 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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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아프

    무엇이든간에 의사소통에 최선이 무엇인가가 주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전공자들 사이에서야 영어로 말해도 상관없지만 비전공자들에게는 이해가 쉬운 어휘를 쓰는게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무조건적인 한글화는..음.. 예를들어 수업시간엔 viscosity라고 말하지만 비전공자들에게는 ‘점성’이라고 말하는게 좋겠죠. 그렇다고 몇몇 저희 학교 교수들이 말하는바와 같이 완전히 한글화 시켜서 ‘속쓸림’이라고 하면 오히려 이해가 잘..
    내부에서 원어를 쓰는건 상관없지만 일단 ‘번역서’라고 나온다면 아무리 한국어로 딱히 말할 용어가 없다해도 한번 쯤 생각해보는 것이 학문하는 사람들의 자세가 되어야 할 듯..(저도 종종 덕분에 고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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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ukesky

      그러니까 특히 과학 계통에서는 전공자들이 비전공자들에게 일종의 ‘홍보’를 하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대중적인 언어를 만들어줘야 하는데 말이야.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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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디오티마

    스타크래프트도 와우도 안 해본 희귀(?)한 사람 여기요.ㅎㅎ
    게임은 직접 총 들고 쏘는 것만 즐기는지라 다른 건 잘 모르겠어요.

    혹 패션지 보십니까?
    접속어와 조사 빼곤 거의 외국어라고 봐도 무방하더군요.
    한글로 써져 있으나 한국어가 아닌 거죠.
    외국 잡지에서 인터뷰나 정보들을 그대로 가져오다보니 벌어지는 일이라던데 읽기 괴롭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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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ukesky

      오오, 총들고 하는 거! 전 기껏해야 타임 크라이시스정도만 조금…ㅠ.ㅠ 패션지의 악명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습니다. 해석하면서 읽어야 한다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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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디오티마

      나이에 비해 취향 후지다(!)라는 소리 때문에 펼친 패션지는 다른 세상입니다. 해석하고나서 보면 별 내용 아니에요.킁~
      타임 크라이시스 무지 좋아해요. 합정동, 서교동 일대에 오락실이 없어서 못한지 오래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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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Lukesky

      전 엄청 후짐에도 불구하고 주위에서 포기했는지 저를 너무 잘 아는지 패션지는 추천해주지 않더군요. ^^*
      그런데 디오티마님…저희들 회사 가까운 곳에 있나봐요,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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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A셀

    와우 나오기 전에 전작인 워크래프트 1~3을 쭉 영문판으로 해서 10년 가까이 (그것도 성장기에) 영어 이름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와우에서 한글화된 걸 접하니 여러가지로 생소하더라고요 ‘ㅂ’ 그래서 번역 맘에 안든다고 첨에는 꽤 많이 투덜댔는데, 또 게임 하다보니 오히려 한국어 이름이 더 정감이 가더라고요? 지금은 파이어볼보단 화염구가 맘에 들 정도예요.

    스타크래프트도, 지금은 이런저런 말들 많이 하지만, 어차피 게임 나오고 나면 저처럼 다들 그렇게 적응하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공개된 동영상에서 ‘마린’이 아닌 ‘해병’이 한국어로 ‘드디어, 올 것이 왔군.’ 하는 걸 들었을 때도 그렇게 어색하다는 생각이 안드는 걸 보면, 믿어볼만한 거 같아요. ‘ㅅ’

    개인적으론 지금 당장 개선이 시급한 건 영화 번역 쪽이 아닐까 싶네요. 특히 전설의 홍주희씨. 이번에 TF2에서도 어김없이 유행어가 들어갔더군요. ㅠ.ㅠ 독자를 가르쳐먹으려고 멋대로 내용을 바꾸는 자막도 그렇고(영문 자막으로 NEST 라고 뜨는데 ‘트랜스포머 작전 본부’…) 특히 Rail Gun, ‘초전자포’라는 괜찮은 용어가 이미 있는데 (http://www.yes24.com/24/goods/3246355) ‘강철 미사일’이래요 세상에! 강철도 미사일도 대체 어디서 불쑥 튀어나온 말인지 모르겠더군요. 외계 로봇도 때려잡는 막강한 미 해군 최신 무기의 이름을 번역하는데 ‘강철’이라니….. 아아…. 지금이 무쇠팔 무쇠다리 마징가 제트가 호령하는 시대도 아니고…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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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ukesky

      아무래도 쓰다보면 모국어 쪽이 훨씬 정감가기 마련이니까요. 전 원래 ‘얼음화살’같은 표현의 팬이라서. ^^*
      악, 저 내일 트랜스포머 보러가는데, 자막이 그렇단 말입니까. ㅠ.ㅠ 그건 그렇고 레일건이 강철미사일??? 강철미사일?? 뭡니까, 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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