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할 수 있으리.

작년 겨울 시작된 우울증은 전례없이 심각하고 길게 지속되었다. 덕분에 혼자 집에 앉아 술마시는 버릇이 들어버렸다.
겨우 내내 맥주 한캔에서 시작해, 혹은 백세주나 산사춘까지, 양은 비록 적었지만 내가 생각해도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마셔댔고 심지어 이러다가 진짜로 알콜 중독자가 되는 게 아닐까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결국 5월쯤 퇴근하고 집에 들어올 때마다 가게에 들러 사 오던 맥주와 안주를 끊었다.

7월, 맥주가 간절해지는 계절이 돌아오면서 다시금 손에 맥주 한 캔을 들고 퇴근하는 버릇이 되살아났다.
덥다. 마신다. 하루 한 캔. 우울해진다. 즐겁다.
어찌보면 그다지 대단한 양도 아니고, 여름이면 누구나 할 짓이라고도 생각되지만
그 짓을 한 달쯤 하게 되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성인이며 자취생인 나는 옆에서 그러한 행동을 통제해줄 사람이 없다.
또한 삶에서 ‘해야할 일’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는 인간으로서, 나는 ‘하고 싶은 일’이되 ‘할수 있는 일’이 생기면 사람들의 충고에 잘 따르지 않는 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납득하고 결심하지 않는 한 행동을 잘 변화시키지 않는다.

집에서는 결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결심한지 닷새가 지났다. [그래도 밖에서도 안 끊은 건 이것이 ‘강도’와 ‘양’의 통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두번의 위기가 있었으나, 콜라와 물과 사과로 버텨내는 중이다. 나름대로 쓸만 하더군. 몸은 오히려 좀 더 피곤해진 듯 하다. 나라는 인간은 얼마동안 신경을 쓰지 않으면 그냥 머리 속에서 사라지고, 머릿속에서 사라지면 그것의 ‘존재’ 그 자체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몇 주일만 버텨내면 그 이후는 별 문제가 없으리라 보인다.

아마도 이렇게 굳은 결심을 하게 된 데는 지금 읽고 있는 “800만가지 죽는 방법’의 도움도 컸던 것 같다. 지하철에서, 술을 끊은 알콜 중독자 주인공이 다시 술을 마시게 되는 과정이 지나치게 실감났기 때문에, 그 합리화의 과정이 정말 가슴에 사무치도록 실감나게 다가왔기 때문에. “맥주 한잔, 맥주 두잔, 짐빔 10그램, 20그램, 하루 한잔, 하루 두잔, 12시간마다 한잔, 60그램…..그리고 몇 잔. 난 통제할 수 있어. 이것봐 앞에서도 잘 했잖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데 굳이 숫자로 제한할 필요는 없어!”

나도, 그 과정을 겪고 있는게 아닐까 싶었다.
“하루 맥주 한캔 정도. -_-;;;; 끊고자 하면 언제든지 끊을 수 있어. 여름이라서 그래. 몸이 망가지는 것도 아니잖아….”

언제든지 끊을 수 있다면 지금 시작하는 게 낫겠다.
나의 가장 큰 장점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 능력을 잃으면 난 단순히 미친놈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마시는 ‘하루 한캔의 맥주’는 위험하다.

잘 할 수 있으리.”에 대한 10개의 생각

  1. Deirdre

    저도 작년 여름에, 처음엔 속이 안 좋아서 3분의 1잔 정도로 와인 마시기 시작한게…. 1달만에 하루 3잔은 마셔야 학교에 갈 수 있을 정도가 되더군요, 안 마시면 속이 메스껍고 어지러워서 일어나지도 못하겠더라고요… 결국 혼자서 와인 5병을 마신 것을 깨달은 날부터 단 한방울도 안 마시기 시작해서 2주일이 지나니 더 이상 알콜의 유혹을 느끼지 않더라는…. 하지만 웃기게도 저희 부모님은 안 말리시더라고요. 오히려 학교 가려면 더 마셔야지 않겠냐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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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電腦人間

    그냥 저 불러 주셈. 지난 번 신세졌던 것도 갚을 겸 맥주 한 잔 사도록 하죠. 혼자 마시지 마세요. 늦게라도 상관없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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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해명태자

    저 지난 겨울에 우울증이 좀 많이 올라가서;;;
    어제는 농담같이 말했지만 그때 정말 집에 있는 소주-주로 아버지께서 선생님들 테니스 시합에서 상품으로 따오신 것들-를 보이는대로 먹어치웠어요.(엄마가 계란이나 오이 갯수는 기억하셔도 술 재고는 기억 잘 못하심) 결국 고기 재우려고 사다놓으신 것 까지 손을 대는 바람에 엄마한테 걸렸지만….
    분명히…. 통제해줄 사람이 없을때 그러시는 것, 위험해요…..
    어제 뵈었을 때 많이 피곤해 보이시던데 건강하셔야죠. 🙂
    담에 뵐께요. 🙂 아, 요즘은 잠이 안 오거나 술 생각이 나면 편의점 와인에 물 타서 마시고 있어요;;; 맥주는 가끔 마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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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THX1138

    이겨내실겁니다. 루크님이 글을 쓰신다는 것은 꼭 이겨내야 겠다는 다짐을 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글을 쓴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이렇게 공개된 곳에 본인의 속내를 털어놓기가 많이 어렵잖아요. 루크님이라면 가능합니다. 힘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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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lukesky

    Deirdre / 그대의 주량이 장난 아닌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으나, 혼자서 와인 5병이라니, 정말 무서운걸…..-_-;;;; 장난이 아니잖아.
    정말 부모님 강하시구나…ㅠ.ㅠ
    사실 나도 요즘 맥주 대신 KGB 등에 손이 간게 한 두번이 아니라서…으흑.
    비밀글1/ ^^* 친절하신 말씀 정말 감사드립니다. 못참겠으면 그렇게 할게요.
    비밀글2/ 그대도 조심하는 것이 좋겠다. 내가 할말은 아니지만, 요즘 내 주변 사람들도 대부분 다들 상태가 안좋은 듯. -_-;;;
    사과주스/ 예,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비밀글3/ 감사합니다. 비밀글3님도 요즘 글에서 우울함이 보이더군요. 함께 힘냅시다!
    비밀글4/ 사실 아무리 남들이 확인할 수 없는 부분이라도 말이나 글로 남겨놓으면 실천이 쉽지 않을까 하는 속내가 있었습니다.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 잘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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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Deirdre

    자, 잠깐…. 전 별사 분들과는 함께 술 마신 적이 절대 없는데, 누가 제 주량이 장난 아니라고 그래요???????? 전 소주는 못 마시고 오직 와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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