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이 ‘전달’에 불과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가끔씩 일을 하다보면 짜증이 턱 밑까지 올라올 때가 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란, 적어도 어느 정도 교양이나 지식, 사회적인 권위를 갖추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고, 그 비율을 냉정하게 따져 볼 때 대개 기득권층에 속할 확률이 높다. 따라서 일부 문학, 혹은 획기적이거나 가볍거나 일부 좌파지식인들의 글을 제외한 책들은 거의 중앙, 혹은 오른쪽에 속해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번역 되는 책들은 더욱 그렇다. 센세이션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안정’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의료 정책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저자의 직업을 생각하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모든 것을 철저하게 병원과 의사의 입장에서, 경제적인 원칙에 입각해[이게 문제다] 그리고 있다. 그는 현 의료제도를 악용하는 환자들에 대해 의사나 병원도 그에 대항할 수 있는 동일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얼핏 보면 참으로 논리적이고 중립적으로 자본주의/민주주의적 “원칙”에 합당한 주장을 펼치고 있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의사나 병원은 악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다수의 순진한 환자들이 아닌 일부 악질적인 이들을 비난하면서도, 일부 악질적인 병원이나 의사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들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병원이나 의사가 부정적인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그나마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원인을 ‘환자에게 너무나도 관대한 제도’에서 찾고 있고, 그 권리를 의사들에게 돌려주면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갈 것이라 말한다.

처음 몇 부분에서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였으나, 점점 저자의 전반적인 사고방식이 드러나면서 계속해서 불쾌해지고 있다. 가장 무서운 것은, 그는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촉수를 세우면 눈치 챌 수 있으나 그렇지 않으면 계속해서 그의 논리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

나는 이런 책이 두렵다. 의식 없이, 단지 “정보”를 받아들이기 위해 책을 읽었을 때 무의식중에 침투할 이러한 사고방식이 무섭다. 가지고 있는 자들이 가진 자들의 논리에 공감하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가지지 못한 자들이 가진 자들의 논리를 이해하고 거기에 설득당하는 게 끔찍하다. 진짜로 무서운 이들은 막무가내로 덤벼드는 게 아니라 이렇게 설득하려 드는 인간들이다. 1과 10은 엄연히 다르지만, 1부터 시작해 천천히 2, 3, 나아가 8, 9, 10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 결국은 1에서 10이라는 결론을 “마치 그것이 정의라는 듯” 이끌어내는 인간들.

그리고 앞으로 이 책을 읽을 사람들도.
저 나라의 풍토와 한국의 풍토가 엄연히 다르거늘, 우리는 아직 갈 길이 한참 먼데도 “저거 봐. 저 길은 안 돼”라고 말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두렵다.

내 일이 ‘전달’에 불과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에 대한 8개의 생각

  1. Mushroomy

    본인과 같은 의사라 봐 준다는 식인가요…… 쳇…. 오히려 그럴 수록 더욱 냉정하게 파헤쳐야 하는데….. 물론, 환자들도 다 똑같은 성격을 갖진 않았으니 의사와 병원을 악용하는 환자들도 있겠지만, 제 생각엔 의사들이 환자들을 악용하는 일이 훨씬 더 할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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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작은울림

    저런 경우는 이땅에도 수없이 많죠…조중동을 비롯한 기득권 언론이나 ,
    수구 기득권의 이해논리에다 싸구려 교양이란 설탕물을 발라서 글을 파는
    이인화, 이문열 같은 경우도 그렇구요..

    그나저나 말씀을 들어보니 번역하시는분들의 괴로움과 씁쓸함을
    조금이라도 알것 같습니다.

    힘 내세요…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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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지그문트

    자기 감정을 완전히 버리고 저자와 동일시해서 번역한다는 거… 참 힘들죠.
    저도 번역 아닌 해석 수준으로 가끔 일문을 건드립니다만 성격에 맞지 않는 마초글이나 기득권글 보면 그 내용을 치고 있는 자기가 더럽혀지는 느낌조차 들더라구요…
    이래저래 살려면 힘드네요.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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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rumic71

    뭐 중요한 건 읽는 이가 얼마나 공감하느냐입니다. 공감해버린다면 거기엔 더 토를 달 수 없는 것이구요. (설득과는 좀 다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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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lukesky

    Mushroomy/ 분명 제도 상의 허점이 있다는 것도 인정하고[허점없는 제도는 없으니], 자기 중심적 시점으로 글을 쓰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바긴 한데, 너무 교묘하달까요. 거기다 권력구조가 기본적으로 다르다는 걸 간과하고 있어요.
    작은울림/ 그렇지요. 그래서 오히려 조갑제의 글은 웃으면서 볼 수 있지만 냉정을 가장한 글들은 더욱 짜증이 나는 거죠.
    으으, 뭐라고 반박이라도 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으니 속이 터져요. ㅠ.ㅠ
    금숲/ 電腦人間 / 끄덕끄덕 3 ^^*
    지그문트/ 배배꼬인 문장 탓도 있지만 덕분에 속도가 장난이 아니게 느려졌습니다. ㅠ.ㅠ
    rumic71/ 으음, 설명을 제대로 못한 듯 한데요, 진실로 저기 공감하는 이들한테는 저도 별 관심 없습니다. 단지 저자가 자기한테 불리한 이야기는 쏙 빼먹고 있다는게 영 마음에 안 든달까요. 거기다 기본 전제 자체가 틀려있는데도 거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어요. 어설프게 똑똑한 척 하는 사람들한테 영향을 줄 수 있는 종류의 글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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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푸르팅팅

    "저 나라"라 할지라도 되어먹지 못한 전제를 가지고 있는 책이로다.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를 최대한 잘 전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그대에게 오늘도 경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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