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반지의 초상”

사용자 삽입 이미지미야베 미유키 저

미야베 미유키의 스기무라 시리즈를 좋아하는데, 주인공을 일부러 거세시켜 방해가 될만한 요소를 모두 제거해버렸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행복한 가정, 넉넉한 재정, 거기에 뒤를 봐주는 든든한 권력에 이르기까지. 입으로는 거기에 주눅든 양 행동하고 있지만 실은 그 모든 것을 뒤에 업고 두려워할 것도, 방해거리도 없이 목적을 향해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스기무라가 괜히 극중에서 차분하고 이성적이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는 철저하게 현실과 고립되어 있고 당연히 몇 계단 위에서 관찰자의 입장을 고수할 수 있으므로. 마치 무균실에 있는 것처럼(그가 속해 있는 사보팀도 마찬가지). 이보다 더 작가가 다루기 쉬운 인물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내가 이런 그린듯한 설정과 세계관을 꽤 마음에 들어한 것도 다른 작품들에 대한 반동에서 기인한 게 다분할 테고.
여하튼 이 세번째 작품은 그런 의도가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주인공이 사건에 휘말리긴 해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내 일이 아님’이라는 견지를 유지하고 있고 독자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나는 다단계의 폐해를 그리고 싶어”라는 목적의식만으로 나머지를 끼워맞춘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미야베 미유키의 다른 작품들도 간혹 그런 분위기를 풍기는 녀석들이 몇 개 있지만 이정도로까지 노골적이지는 않았고 주인공들도 어느 정도 호응하고 어우러져주었지만 이 소설은 원래 제3자의 특성이 짙은 스기무라가 주인공이 됨으로써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사건은 흥미롭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 물론 이 시리즈의 전작 두 개도 그랬지. 하지만 스케일이 커진만큼 그게 더더욱 눈에 띄게 되어버렸다고 할까. 원래 이 시리즈의 인물들이 모두 ‘인형’같은 느낌을 주는데 – 주인공과 편집실 사람들이 개중에서 가장 생동감이 넘친다고 하면 말 다했지. – 나호코가 선언을 하는 부분이 정말 그나마 인간같았다. 그 전까지 그녀는 자아도 아무 것도 없는, 아니 실존하는 인물이긴 한 거야? 스기무라의 상상 속에서 존재하는 거 아님? 정도의 느낌을 주는 상태였으니까.
아무리 봐도 스기무라는 장인과 사랑을 했어. -_-;;;;;;;
그래도 본격적인 탐정이 된 스기무라는 궁금하긴 하군.
일본에서 드라마가 나왔다는데 한번 구해 볼까.
덧. 그리고 난 아직도 왜 제목이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인지 모르겠다. 뭐 해석을 하려면 할 수야 있지. 반지는 결혼을 의미할 테고 십자가는 아마도 등에 지고 가야 할 죄를 가리키는 것일테고. 하지만 으음…..과연 적절한 제목이었을지는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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